서석대>‘미완의 혁명’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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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미완의 혁명’ 4·19
이용환 논설실장
  • 입력 : 2024. 04.18(목) 17:27
이용환 논설실장
“대통령을 만나러 경무대로 가자.”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대학생들의 시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1960년 4월 19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 중턱 동국대 교정이 2000여 명의 학생들로 가득 찼다. 동국대에서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까지는 5㎞ 남짓.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3000여 명까지 늘어난 시위대는 을지로와 시청을 지나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마지막 바리케이트를 넘는 순간 경찰이 발포하면서 수십명의 학생이 쓰러졌다. 선두에 섰던 한 청년도 총탄이 가슴을 관통했다. 민주혁명에 첫 피를 뿌린 동국대 법학과 3학년 노희두 열사였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날부터 그 해 5월 29일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할 때까지 시위로 인한 희생자는 전국적으로 사망 186명, 부상 6259명에 이른다. 광주에서도 금남로와 법원 등에서 광주고와 광주일고 등 17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참가했고, 경찰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7명의 꽃다운 청년이 희생됐다. 4.19혁명의 주체도 자랑스런 광주였다. “공산당을 잡으라는 총으로 어린 학생들을 쏘아 죽인 경찰의 행위는 시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혁명이 끝난 1961년 3월, 광주고등법원 특별재판부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했던 당시 광주여객 사장 박인천 전 금호그룹 회장의 증언이다.

그러나 4·19는 지금도 계속되는 ‘미완의 혁명’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등 군부의 쿠데타로 학생들이 흘린 피는 왜곡됐고 그들의 정신도 살리지 못했다. 연세대 송복 교수도 ‘4·19는 혁명이 아닌 의거’라고 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 독재정권을 쓰러뜨렸지만 그 4·19가 정권을 무너뜨린 그 이상 나가지 못했다는 이유다. 서울대 법대생으로 4·19에 참여했던 안동일 변호사도 ‘4·19는 완성이 아닌 진행의 혁명’이라고 했다. 그 역사적 완수도 우리 세대에 남겨진 몫이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19일은 4·19혁명이 일어난 지 64주년이 되는 날이다. 피 끓는 학생을 주축으로 시민이 동참했고, 계엄군은 중립을 지켰던 국민항쟁. 안타깝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사회를 통째로 바꾸는 변혁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 64년이 지난 지금은 되레 이승만 시대로 후퇴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도 ‘미완의 혁명 4·19’가 가져온 아픔이다. 정치와 경제부터 사회와 교육까지. 모든 정의가 실종된 대한민국에서 다시 맞는 64주년 ‘미완의 혁명’이 가슴 아프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