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에세이·임인택>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를 기억할 공간 ‘단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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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세이·임인택>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를 기억할 공간 ‘단골집’
임인택 수필가·광주전남문인협회 회원
  • 입력 : 2024. 04.11(목) 13:38
임인택 수필가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를 기억할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 온기를 만들어 준 사람들도. 그냥 술 한 잔, 밥 한 끼가 아니었던 식당.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소주 한잔하고 싶을 때, 그럼 그곳에 갈까?. 우리들의 약속 장소였던 그 식당.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 그곳에서 매만졌던 술잔이며 식기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가 항상 앉았던, 우리를 위해 늘 비워줬던 그 자리. 눈을 감으면 문득 떠오르는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도 가슴이 저리는 것은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단골집 식당이 사라졌다. 그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사소한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렸다.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낯익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우리의 얘기에 끼어들며 빈 술잔을 채워주던 정을 따르고 정을 주며 함께 했던 그 젊은 친구들. “그대로죠?” 초로의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묻는다.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들이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이다. 그 찌개와 그 김치를 내놓겠다는 이야기다. 정갈하고 시간의 무게가 실린 그릇에 담긴 반찬들. 가짓수를 채우기 위해 손이 가지 않은 음식으로 식탁을 가득 채운 상차림보다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가 깨끗한 그릇에 담겨있을 때 더 행복감을 느낀다. 같은 소주 한잔이지만 어디서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 우리는 더는 동네 소식과 따스한 안부와 위로를 먹던 그 식당의 음식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골목이 사라지자 구멍가게가 없어졌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편의점이 생겼다. 그 많던 단골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당 빵집 과일가게 정육점 문방구 사진관, 가게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주인장 얼굴과 가게 안팎이 눈에 선하다. 모든 단골집에는 적어도 두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오래된 주인과 오래된 자리다. 그래야 단골이 생긴다. 더불어 사는 사람살이를 향기롭게 하던 작은 공간들이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꾹꾹 눌러 담은 윤기 나는 밥과 맛깔스러운 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지고, 알싸한 고향 바다 냄새를 풍기며 한겨울 한기를 달래주던 해물탕집도 사라졌다. 고개를 내밀어야 보이던 대폿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

사람들이 굳이 단골집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친구가 없는 삶이 삭막한 것처럼, 단골집이 없는 삶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단골집은 노동과 휴식, 일터와 집 사이에 있는 경계의 장소다. 단골집은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좋은 장소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리적 허기를 채우는 행동만이 아니라 정서적 허기를 채우려 먹기도 한다. 구원과 위안은 미래의 원대한 것보다 오늘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게서 온다. 식당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바뀔까만,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늘 눈물 나게 한다. 기억과 기억을 이어준 작은 발자국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사소한 위안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동네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한 시대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옛 마을은 그렇게 상전벽해가 되었다. 집도 사람도 새로워졌다. 오래된 것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지만, 새로운 것에서는 공장 냄새가 난다.

오늘은 문득 소주 한잔하며 닫혀 있던 가슴을 열고 감춰온 말을 하고 싶은 친구가 보고 싶고 기다려진다. 부르면 언제나 나올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소주잔 속에 못다 한 얘기가 농축돼 술이 더 달고 맛있다. 때론 소주 한 잔의 여유 속에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친구. 굳이 인연의 줄을 당겨 묶지 않아도 관계의 틀을 짜 넣지 않아도 술잔이 비어갈 무렵 따스한 인생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 오늘은 문득 별다른 멋이 없어 더 멋진 그런 친구가 그리워진다. 살다 보면 만나지는 인연 중에 닮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

“어, 거기서 만날까?” 하다, 갈 곳이 없다. 이젠 길에서 만나 갈 곳을 정하는 뜨내기가 되었다. 나이 먹은 우리를 반겨줄, 언제쯤 다시 그런 단골집이 생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