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은 말뿐 … 5·18 사적지 ‘흉물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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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복원은 말뿐 … 5·18 사적지 ‘흉물 방치’
광주 29곳·전남 29곳 공식지정
광주, 지난해 재정비 결정에도
예산 부족으로 보존·관리 부실
전남 추모·기념공간 조성 난관
“훼손·방치 않도록 점검강화를”
  • 입력 : 2024. 03.26(화) 18:25
  • 글·사진=정상아 기자·윤준명 수습기자
21일 광주 동구 고(故) 홍남순 변호사 가옥은 대문이 훼손돼 활짝 열려 있으며 내부는 낡고 허름한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정상아 기자
“여기서 70년 넘게 살았는데 홍남순 변호사 댁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지 처음 알았네. 관리가 안되고 방치된 모습을 보니 광주시민으로서 부끄럽소.”

지난 21일 광주 동구 고(故) 홍남순 변호사 가옥 앞에서 만난 주민 강성숙(72) 할아버지는 방치된 5·18 사적지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에 평생을 바쳤던 고 홍남순 변호사 가옥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 인사들이 드나들며 수습 대책 회의를 해 ‘민주사랑방’으로 불렸던 장소로 지난 2017년 5·18사적지 제29호로 지정됐다.

홍 변호사 가옥은 복원을 앞두고 있다는 광주시의 입장과는 다르게 대문은 누가 훼손시킨 것처럼 부서져 활짝 열려 있고 사이로 보이는 내부 모습도 여느 폐가와 같이 낡고 허름해 보였다. 강 할아버지는 “광주시와 동구가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한다”며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인데 보존하고 알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주시는 지난해 1월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29곳에 대해 재정비 및 원형복원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예산 부족 등의 문제로 사업 시행이 미뤄지면서 사적지가 방치돼 관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광주 서구 옛 국군광주병원 일대에 화정근린공원 조성 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옛 국군광주병원 건물은 유리창이 깨져있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등 흉물로 방치되고 있다.
같은 날 찾은 서구 화정동 옛 국군광주병원 일대. 5·18 사적지 제 23호인 옛 국군광주병원 일대에는 화정근린공원 조성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시는 옛 국군광주병원이 함평군으로 이전하면서 역사적 상징성이 높은 건축물은 보존하고, 기존 수림대를 최대한 보전하면서 산책로와 주차장, 어린이 놀이터 등을 확충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공원 조성 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옛 국군광주병원 건물은 유리창이 깨져있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등 황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인근 주민 추상호(64)씨는 “건물을 다 남겨놓고 방치해놔 흉물스럽다”며 “주요 건물만 남기고 철거해 조형탑과 역사 공원을 조성하고 후대가 기억할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해야 한다. 광주시에서 결단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주민 김모(66)씨는 “주변에 공원이라도 조성해서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처음에는 으슥한 분위기에 근처를 지나다니지도 못했다”며 “보수라도 해 놓으면 사적지 탐방으로 시민들이 많이 찾아왔을 것 같은데 사적지인지도 모를 정도로 방치돼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옛 505보안부대에 역사 공원이 조성됐지만 보안부대 건물 내부는 타일이 깨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물건들이 검은 천으로 둘러싸여 있는 등 정비가 필요한 모습이다.
정비를 마친 사적지 역시 방치된 상태다.

광주 서구 5·18 사적지 제26호 옛 505보안부대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투옥되고 고문을 받았던 장소다.

보안부대 일대는 지난 2021년 5월 5·18역사공원으로 재탄생했지만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보안부대 건물 내부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물체들이 검은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곳곳에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는 등 관리가 부실한 모습이었다.

주민 김모씨(85)는 “건물을 보수하더니 또다시 방치하고 있어 근처를 걸어 다닐 때마다 무서운 느낌이 든다”며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꾸준한 관리와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광주 지역 곳곳에 5·18 사적지가 29곳 있지만 대부분 보존·복원되지 않은 채 흉물로 방치되고 있었다.

노후화된 건물을 이용하기엔 위험도가 높고 복원이나 부지 활용 등으로 방안을 마련해도 사업비 확보에 제동이 걸려 정비 사업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광주시의 입장이다.

광주시 관계자는 “건물 자체가 워낙 오래되고 해당 건물을 활용하려면 기준이 엄격하다 보니 보수·보강 비용이 많이 든다”며 “현재 사적지 중 일부는 활용 방안이 마련된 상태지만 사업비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 구체적으로 공사 추진이 확정된 곳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이어 “사적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표지석, 주변 환경 등을 점검하고 있으며 사적지를 정비하기 위해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며 “사적지가 훼손·방치되지 않도록 점검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지역 5·18 사적지도 상황은 마찬가지.

전남지역에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장소는 70곳이 넘으며 그중 공식 사적지로 지정된 곳만 해도 29곳이나 된다.

5·18 당시 피해자 상당수가 전남지역 주민들임에도 홍보가 부족한 탓에 지역민들조차 사적지 위치를 알지 못했으며 사적지 주변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는 등 관리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전남에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나 프로그램도 별도로 마련되지 않아 5·18 정신 계승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전남도 관계자는 “각 시·군에서 사적지와 표지석 등을 점검하고 주변 환경 정비에 나서고 있다”며 “전남도는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한 전남 대표 시설을 만들기 위해 기념공간 조성을 계획 중이나 국비 반영이 어려워 정부에 지원을 건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글·사진=정상아 기자·윤준명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