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감독의 기이한 경험이 만든 새로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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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감독의 기이한 경험이 만든 새로운 이야기
셀린 송 감독 ‘패스트 라이브즈’
  • 입력 : 2024. 03.10(일) 14:33
셀린 송 감독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제공
셀린 송 감독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CJ ENM 제공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는 한국계 셀린 송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작가였던 그녀의 감독 데뷔작이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면…,(11일 있을 시상식에 기대를…) 뭔가 특별한 참신함이 있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앞섰다. 무엇보다 코리언-아메리칸의 작품이라 관심이 더 기울여졌다. 프롤로그는 데뷔작답게 셀린 송 감독의 경험에서 가져왔다. 뉴욕의 어느 바에서 새벽 4시가 넘도록 옛 친구를 남편과 함께 만난 경험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감독의 기이한 경험이 영화라는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는 ‘영화적’ 인트로인 것이다.

12살 소녀 나영은 좋아하던 친구 해성과의 데이트를 마지막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다. 12년의 세월이 흘러 나영, 곧 노라(배우 그레타 리)는 극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미국 뉴욕에서 살게 된다. 어느날 SNS를 통해 대학생이 된 해성(배우 유태오)이 ‘옛 친구 나영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영상통화로 재회하게 된다.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끈끈함이 변함없이 그들을 이어주고 끌림이 느껴지자 노라는 단호하게 과거와의 이 연결을 끊는다. 다시 미국인으로서 현재의 삶에 집중하며 결혼도 하고 작가의 길을 걷던 그녀에게 12년 만에 해성이 뉴욕을 찾아온다.

24년 만의 재회. 그리움과 연민, 애틋함으로 가득 찬 이 둘의 만남을, 세 사람이 겪는 심리를 감독은 기존의 사랑 이야기로 풀지 않았다. 나영에서 노라가 되기까지 문화적 뿌리를 잊고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민 2세로서의 정체성, 24년간 체득된 북미권 문화인으로서의 삶의 방향을 결코 거스를 수 없어서다. 해성 또한 어느날 갑자기 떠나버린 첫사랑과 12년 만에 영상으로 만났지만 다시 상실의 아픔을 겪고, 12년 후인 24년 만에 드디어 만남을 이룬다. “와!”라는 외마디만 나오던 그들. 그렇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의 흐름, 물리적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역학관계를 실감하고 내세에서의 만남이라는 실낱 같은 소망으로 해소해 볼 수밖에 없다. 그에게 ‘내세’란 그나마 위로가 되는 개념이었으리라.

이들의 만남에 끼여 있는 노라의 남편 아서(배우 존 마가로)는 해성의 등장으로 팽팽한 긴장감부터 갖는다. 그렇지만 이 불편함을 노라가 말하는 ‘전생(past lives)’과 해성이 말하는 ‘인연(providence, fate로 설명이 불충분한)’으로 이해함으로써 아서대로 수용의 영역을 넓힌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사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인연’의 개념을 도입한다. 불교에서는 무한한 시간의 의미인 ‘겁(劫)’이 쌓여 ‘인연’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7000겁의 세월을 누적하는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현생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으며 옷깃을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 없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다는 동양적 윤회사상을 담은 것이다.

감독이 차용한 ‘인연’의 개념은 서양인에게 매우 생소하면서 놀라운 개념이자 그들의 삶에 철학적 지평을 넓혀주는 내러티브여서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풍부하고도 관조적인 탐구로써 삶의 경험에 대해 조용히 생각할 여지를 주는 영화인만큼 배우들의 연기력이 중요했다. 유태오와 그레타 리는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과 애틋하지만 얽힌 미묘한 감정을 눈빛과 작은 움직임, 말투 하나하나에 담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들의 열연으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메시지는 완성도 높게 전달되었다고 본다.

셀린 송은 송능한 감독의 딸이다. 심리학 전공인 그녀가 연극 쪽으로 선회한 것은 부친의 영향력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심리학적 배경과 영화적 DNA 외에도 중요한 점은 작가가 연출한 영화라는 점이다. 크고 작은 영화상에서 각본상과 감독상을 받고 아카데미상에 오른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벌써부터 서점가에는 시나리오 ‘패스트 라이브즈’가 출간되어 주목을 받는 중이다. 3월 6일 개봉.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