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주민들 심성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 상선약수마을로 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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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주민들 심성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 상선약수마을로 불려
●장흥 평화마을
평산(平山)신씨의 화(化)속지
고건 도지사 저수지 ‘우민호’
세월의 더께 그림같은 풍경
무계고택 원림 속 집 연상케
명물 억불산·편백숲 우드랜드
  • 입력 : 2024. 02.15(목) 10:35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평화리 표지석. ‘상선약수’ 표지석과 함께 세워져 있다.
무계고택의 대문 밖 풍경.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느티나무와 좀팽나무가 대숲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배롱나무와 어우러지는 고택 앞 연못. 한여름엔 형형색색의 꽃을 피워 환상경을 연출한다.
저수지에 반영돼 비치는 평화마을 풍경. 여느 마을보다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읍내에서 마을로 가는 길처럼 반듯하게 쭈-욱 뻗었다. 그다지 길지 않지만, 품새는 유명 가로수길에 버금간다. 새봄을 부르는 비가 내리면서 안개까지 내려앉아 몽환적이다.

가로수길 입구에 문학비가 서 있다. 소고당 고단(1922~2009)의 규방가사를 새긴 비다. ‘고향이 그리워서 서둘러 온 친정길/ 우리친정 장흥평화 수려한 산천이여/ 사면을 바라보니 신구감회 갈마든다...’ 이 마을을 친정으로 둔 고단은 조부에게서 한학과 신학문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저수지와도 맞닿아 있다. 호수에 반영돼 비치는 마을 풍경이 단아하다. 저수지 둔치를 따라 난 산책길도 오붓하다.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인데, 어디보다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호반의 마을이 평화리다.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에 속한다. 저수지는 평화저수지다. ‘우민호’로도 불린다. 고건 옛 전남도지사와 엮인다. 1975년 37살의 나이로 전남지사가 된 고건이 이 마을에 들렀다. 지금의 저수지는 당시 논이었다. 한 주민이 물 부족으로 농사에 큰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어 줄 것을 건의했다.

저수지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80년대 초 교통부장관과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고건이 저수지 건설을 직접 챙겼다. 저수지가 ‘우민호’로 불린 이유다. 우민은 고건의 호다. 저수지 축조를 건의한 이는 고영완(1914-1991)이었다.

고영완은 장흥초등학교를 거쳐 광주서석초등학교와 서울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유학한다. 일본에서 항일결사인 조선학생동지회에 참여하고, 전라도 책임자를 맡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조선학생동지회는 여러 나라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격문도 썼다. ‘전 조선학생 동지들이여/ 궐기하자!/ 일본왕국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탈했다/ 남은 것은 생명뿐인데, 그것마저 앗아갔다/ 최후의 단말마 일본을 타도하자/ 오는 3월1일을 기해 일제히 일어나자...(후략)’

거사는 성사되지 못했다. 하부조직이 일본경찰에 발각되면서 조직원들이 붙잡혔다. 고영완도 고문을 받고 투옥됐다. 아들의 투옥에 충격을 받은 그의 부친(고동석)도 사망했다.

고영완은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장흥지부장, 미군정하 초대 장흥군수를 지낸다. 1948년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나간다. 한국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고배를 마셨다. 1950년 2대, 1960년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2대엔 한국전쟁으로, 5대 땐 5·16쿠데타에 이은 국회 해산으로 의정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치인 고영완은 늘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했다.

고영완은 지역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시설 설립에도 앞장섰다. 1946년 공립중학교(현 장흥중학교) 개교를 위해 논 100마지기를 내놓았다. 학교는 장흥 중등교육의 모체가 됐다. 고영완은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농업기술고등학교도 세웠다. 임야와 논밭 1만㎡도 실습용으로 내놓았다. 주거환경 개선과 도로 건설을 위한 부지도 여러 차례 희사했다.

고영완은 독립유공자였고, 정치가였고, 독지가였다. 그의 호가 ‘무계(霧溪)’다. 고영완이 살던 집이 마을에 있다. 무계고택이다. 집은 일자형의 목조기와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그의 할아버지가 1852년 절집(정화사, 淨化寺) 터에 지었다고 한다.

집은 억불산을 등지고 북향으로 지어졌다. 경사가 급한 땅을 3단으로 정비하고, 맨 아랫단에 대문과 하인방을 뒀다. 가운데에 마당과 창고를, 맨 위쪽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채를 배치했다. 축대를 높이 쌓아 기단을 만들고, 둥근 주춧돌을 놓은 것이 특징이다. 소나무와 느티나무, 팽나무, 배롱나무, 대나무, 동백나무가 무성해 원림 속의 집을 연상케 한다. 지금은 고영완의 장남 고병선 어르신이 살고 있다.

무계고택의 대문 밖 풍경도 압권이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느티나무와 좀팽나무가 대숲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그 사이로 난 돌계단도 정겹다. 연둣빛 봄날과 신록 우거진 여름은 물론 단풍으로 물든 가을과 하얀 눈 내린 겨울에도 아름답다.

고택 앞 연못도 여름날에 환상경을 연출한다. 200년 된 연못을 배롱나무 50여 그루가 둘러싸고 있다. 배롱나무도 100년을 산 고목이다. 꽃도 진분홍색과 흰색, 보라색, 빨간색 등 색색으로 피고 연분홍 영산홍과도 어우러진다. 연못 안 작은 섬에 선 소나무 4그루도 300여 년을 살았다. 연못에 정자 송백정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뼈대만 남아있다. 마을사람들은 연못을 ‘무계호’라 부른다.

평화마을의 다른 이름은 ‘상선약수마을’이다. 20여 년 전 전통테마마을 조성사업을 하면서 ‘주민들의 심성이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고 이름 붙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왔다. 무계고택 옆에 상선약수가 흐르는 샘이 있다.

평화마을은 억불산(億佛山)의 서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 때엔 억불산 봉수대의 관리인이 살았다고 ‘정화소(丁火所)’로 불렸다. 정화소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의 화속지(化屬地)였다. 평산신씨 후손들이 화속지에 모여 살면서 ‘평화(平化)마을’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의 5대손 고응수가 1700년대 후반 담양창평에서 장흥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이후 장흥고씨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평화리는 내평, 외평, 새터 등 3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마을엔 장흥위씨 시조단과 제실인 회주사(懷州祠)도 있다. 회주사는 사당과 강당, 정각, 사적비와 신도비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장흥의 명물 억불산과 편백숲 우드랜드, 천문과학관, 봉수대도 이 마을에 속한다. 한자는 다르지만 풍경도, 사람도 한없이 평화로운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