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담양군 메타프로방스에서 열린 산타마을 축제에서 한 아이가 산타 분장을 한 직원에게 사탕을 선물받고 있다. 뉴시스 |
![]() 박재항 겸임교수 |
거꾸로 광고주를 방문했을 때는 사무실에서 인사하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주 가끔 굳이 엘리베이터 복도까지 나와서 최대의 예의를 갖춘 배웅을 하는 광고주들도 있다. 웃으며 작별 인사로 손을 흔들던 그들도 바로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다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등을 돌린다. 그러면 역시나 갑의 심기를 거슬린 을이 되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인 양 어쩔 줄 모르게 된다. 그렇게 업무로 갑을이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직후, 혼자 남으신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항상 비상상황으로 모셔야 했다.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시간 조정을 자율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했고, 아침마다 아버지께 가서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후에 돌아올 때면 아버지께서 아파트 현관을 연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들을 배웅 나오신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들어가시라 손짓하면 아버지께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 반사 손짓으로 받으신다. ‘닫힘’ 버튼을 누르면 너무 매정해 보이는 것 같아서,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닫히는 걸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어느 날의 그 진공과 같은 시간에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사탕이 잡혔다. 사탕을 꺼내서 드리자 아버지께서 환하게 웃으셨고, 그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모신 추모공원에 일년 서너 차례 다녀 온다. 조부모님의 산소는 거기서 30분 정도 차를 몰고 가서 5분쯤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조부모님 산소에 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인가 보다’라고 하셨지만, 이후 십 년 넘게 꾸준히 한 해에 서너 번씩 모시고 간다. 오르막길에서의 아버지 걸음걸이가 힘겨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지팡이를 짚고 오르기 시작하신 지 꽤 되셨는데, 해가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고 몸동작이 불안정해진다. 부축이라도 해드릴 양하면 결벽증 걸린 사람처럼, 내가 놀라고 서운해 할 정도로 매섭게 손을 뿌리치신다. 어정쩡하게 아버지께서 오르는 발걸음 떼시는 걸 보고 있는데, 내 옆을 지나치면서 사탕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신다. 도와주려던 아들의 손을 매정하게 내리치신 행동에 대한 미안함과 시간을 내서 함께 온 수고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데, 어색하기만 하다. 사탕 하나로 그렇게 대신 마음을 전하신다고 해석한다.
요즘 SNS에서 가끔 보게 되는 제사나 차례상에는 마카롱이나 탕후루 같은 21세기에나 이 땅에 들어온 것들이 올라 있다. 우리집에서도 초코파이는 꽤 일찍부터 상차림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신식 과자들이 오르면서 한과류가 밀려났는데, 대표적으로 자취를 일찍 감춘 게 보통 색동사탕이라고 불렀던 옥춘당(玉春糖)이었다. 사실 옥춘당은 단것이 상대적으로 귀했던 예전에도 제사상에 오르는 한과 중에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약과와 곶감 같은 것에 손이 먼저 갔다. 어른들이 음복하고, 제사상 철상과 가족들이 식사할 밥상 차리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이에 아이들은 밥 먹고 먹을 과자들을 주머니와 양손에 챙겼다. 색동사탕 옥춘당은 녹지 않은 상태에도 끈적거림이 느껴져 외면 받았다. 할머니께서는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 같은 걸 가지고 오셔서 옥춘당을 비롯한 남은 과자들을 담으셨다.
3대가 함께 살던 어린 시절에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바로 조부모님 방으로 가서 인사로 절을 올렸다. 어느 날 낮잠에서 깨어 아침으로 착각하여 여느 날처럼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고 절을 드렸다. 한낮에 아침 인사를 하는 손자를 보고 할아버지께서 잠깐 놀라셨다가 ‘네가 낮잠을 잔 모양이구나’라고 하며 웃음을 터뜨리셨다. 항상 엄하고 무서웠던 할아버지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는데, 어린 당사자로서는 놀라움보다 부끄러움이 먼저였다. 시간을 못 맞춘 엉뚱한 인사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큰소리로 울음이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잠깐, 가만 있어봐라’라고 하시며, 방구석의 할머니 소쿠리에서 색동사탕 하나를 집어서 주셨다. ‘고맙습니다’라며 어색함을 깨트릴 할 말이 생겼고, 그렇게 열었던 입에 사탕을 집어 넣으며 꾸벅 인사하고 물러났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운전을 해서 강의를 하러 다니는 학교가 있다. 제법 멀리 간다고 오전, 오후로 두 과목을 세 시간씩 몰아서 한다. 녹초가 되어 집으로 올 때는 퇴근 시간인지라 도로에 차가 많아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참고 참다가 운전석 옆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서 입에 넣고 굴린다. 몸을 깨우는 당(糖) 이상으로 어색하고 힘든 시간을 함께 하는 동반자와 같은 느낌을 준다. 커다란 눈깔사탕을 입속에서 아껴 굴리며, 겨울철 한 시간 넘는 출퇴근길을 걸어 다닐 수 있었다는 아버지 연배의 어느 문학평론가가 생각났다. 그렇게 어색함을 메워주고, 동반자도 되는 그런 우리 세상의 사탕 같은 존재는 또 무엇이 있을까?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사탕 하나를 다시 입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