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자영 수필가 |
그날, 다행스럽게도 신문을 보다가 다시 마음이 환해지는 기사를 만났다.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축제’, 대전의 어느 자치단체에서 축제장에 내건 펼침막의 내용은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감동을 가져다 주었다. 벚꽃 없는 벚꽃 축제라는 비아냥과 예측하지 못한 행정에 불만을 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는 계속된다’는 위안과 함께 ‘꺾였지만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곧장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란 말은 지난한 해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였다.
프로게임단 DRX 소속 프로게이머 김혁규가 리그 오브 레전드 2022 월드 챔피언십에서 고전하는 팀원들을 다독이며 말했다. “패배는 괜찮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야.” 팀은 역전을 거듭하다 그예 우승까지 거머쥐었고 그는 유명세를 탔다. 이후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오른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이 그 문구가 쓰인 태극기를 힘껏 흔들어 큰 화제가 됐었다.
사람은 대체로 나보다 센 상대를 만났을 때 지레 기가 눌려 해 보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정신을 다잡으며 일격을 노려 보아도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은 허방을 짚고 허둥대다가 상대의 기습 한방에 주저앉기 일쑤다. 그때 절실히 필요한 게 바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은 단순한 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꺾이면 어때 다시 털고 일어서면 되지 뭐.’ 하는 것은 누군가를 의식하며 기죽지 않는, 순수의 유연성이자 자존감일지 모른다. 주름을 잡아 꺾이도록 만들어 놓은 빨대처럼 꺾였을지라도 다시 곧추세우면 되는 것이리라.
어느덧 가을, 지난 한 여름 뒤에 찾아와 코끝을 황홀케 하던 금목서 꽃향기도 어느 틈에 사그라졌다. 하지만 곧 들국화 피어나고 여기저기서 가을꽃 축제가 열릴 것이다. 누렇게 바래 고개 숙인 들판과 핼쑥해진 잎들을 보며 쓸쓸함에 젖는 것도 마음이 익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이젠 안다. 그런지라 부러 감상(感傷)에 빠지지 않으려 해 보아도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은 왜인가.
자애롭게 내리비치는 가을 햇살처럼 삶이 늘 광명이라면 좋겠지만 어둠은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삶의 안에는 때때로 예고 없이 엄습해오는, 일몰 같은 슬픔도 있다. 국화 향기 피어올라 가을인가 했더니 세상 곳곳이 조의(弔意)의 국화 향으로 눈물겹다. 멀리서 전쟁과 지진으로 터전 잃은 난민의 아우성과 무구한 이들의 죽음 소식이 연일 들려오고 있다. 가까이에서는 축제를 즐기러 갔다가 황망하게도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청춘들의 1주기 추모제가 열려 많은 이들을 슬픔에 빠뜨렸다. 코스모스부터 구절초, 쑥부쟁이, 꿩의비름, 물봉선, 여뀌, 오이풀, 억새까지 형형색색 피어난 가을 꽃들과 함께 노랗고 붉은 단풍꽃 피어나 천지가 다시 축제인데 마음껏 웃음꽃 피우기엔 미안하기만 한, 잔인한 시절….
누군가는 인생은 축제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산다는 건 또 하나 하나 쌓인 숙제를 해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꽃이 지고 계절이 가도 계속되어야 하는 삶을 축제로 만드는 것 또한 우리가 해내야 할 숙제이리라.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축제’. 무겁게 흘러갔을 그 봄날의 축제에 한 마디 문구로 생기를 불어넣은 대전 공무원들의 위트와 패기에 답이 있었다. 지고 또 피는 일은 꽃의 순리요, 끝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중요한 건 바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