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주 교수 |
그 지리적 위치상 대만 방어의 최전방 기지 역할을 한다. 본토의 공격에 대비하여 섬 전체가 요새화되어 있다. 중국 본토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1949년 10월 ‘고령두 혈전’을 통해 모택동 군대를 패퇴시킨 바 있다. 1958년 ‘금문 포격’ 당시 중공군은 44일 동안 무려 47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지만, 금문도의 결사항전에 밀려 섬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한다.
금문 포격전에 사용된 중공군 포탄의 탄피는 단단한 경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섬 주민들은 이를 재활용하여 주방용 칼을 만들었다. 78년까지 이어진 중국의 포격으로 2,000여 명이 넘게 사망했지만, 끝까지 섬을 사수해낸 그 의기가 진정 대단하다. 집집마다 지하 벙커가 설치되고 섬 전체가 땅굴로 연결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냉전 초기의 대표적 피해국이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이다. 장개석-모택동 군대의 ‘국공내전’ 당시 장개석 군대는 미국이 원조해준 무기를 팔아먹을 정도로 부패했다. 그 결과, 장개석 군대는 패전을 거듭하며 급기야 대만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된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영국, 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지도국이던 장개석 정부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의 일원으로 대우받는다. 그러나, 이 지위는 1972년 미국의 닉슨 정권이 모택동 정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끝난다. 중국의 부상 및 이에 따른 외교력 강화로 대만의 국제적 위상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현재, 교황청 등 불과 10여개 국가가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 이상 유엔 회원국도 아닌 대만의 외교적 고립은 계속 심화되고 있다.
대한민국과 대만(중화민국)의 인연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4월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거사한 후, 장개석은 “4억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 당시,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의 도움 덕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일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을 설득하여, ‘일본 패전 후 조선독립’ 선언을 이끌어낸다. 1949년 1월, 중화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신생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양국 간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던 중화민국(대만)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함께 유엔군 파병을 지지한다. 한국전쟁 초기에, 대만은 3개 전투사단 3만 3000명의 한반도 파병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한국 거주 화교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심리전 요원으로서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을 상대로 투항을 권유하는 일을 맡는다.
1953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은 대만을 공식 방문하여, 장개석 총통과 정상회담을 가진바 있다. 당시 양국은 신생 공산국가인 중공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을 창설할 정도로 긴밀한 우방이었다.
1980년대 말 냉전 종식으로 국제정세에 일대 지각변동이 초래된 가운데, 한국은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당시 한-중 수교 교섭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오랜 맹방이던 대만을 배려한 세심한 소통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만은 한국에 대해 ‘배신자’라며 강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정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한-중 수교에 대해 함구하다가, 주한 대만 대사를 불러 겨우 3일의 여유를 주면서 한국을 떠나라고 일방 통보한 것은 비정한 처사였다. 물론 중공을 자극하지 않기위한 조치였겠지만, 우리가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상황에서 보다 정교한 관리가 필요했다. 단교 이후, 한국과 대만은 상대국에 대사관이 아닌 ‘대표부’를 운영하며 비정부 차원의 관계를 유지 및 강화해오고 있다.
외교적 고립에 처한 대만의 상황을 지켜보며,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금언을 재확인한다. 동시에, 군사 강대국인 중국의 침공에 맞서서 결사항전의 결기를 보여주고 있는 대만은 우리에게 자강(自强)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직면해 있는 우리로서는 중국- 대만 관계 추이를 예의 파악하면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 기본축은 ‘행동하는 한미동맹(Alliance in action)’의 실현이고, 한미일 안보협력의 확대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대만과의 접촉면이 다각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특히,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인 한국-대만 간 관광교류 등 국민외교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