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에세이·임인택>시(詩)는 글이 아니라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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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에세이·임인택>시(詩)는 글이 아니라 노래다
임인택 수필가·광주문인협회 회원
  • 입력 : 2023. 10.19(목) 12:46
임인택 수필가
파래서 너무 파래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하늘 아래, 시의 쪽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10월, 금목서가 꽃을 피웠다. 가슴을 덮이는 달콤하고 아련한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다른 나무 꽃들이 거의 다 시들은 요즈음 마디마디 주황색의 잔꽃을 잎겨드랑이에 매달고 진한 향기를 내보내며 손짓한다. 바람이 지나가며 수를 놓는 듯 마당에 떨어진 꽃잎이 액자에 담긴 시어(詩語)들처럼 말을 건다. 이렇게 마음을 유혹하는데 어찌 유혹당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금목서 나무 아래 앉아 따뜻한 햇볕을 등받이하고 시집을 편다. 얼마 전 새 시집을 냈다며 보내온 친구 시인의 시집이다. 성근 목서나무 가지 얼레빗으로 곱게 빗은 듯 가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헤집고 나와 시집 위를 서성인다. 내 눈이 읽기 전에 사운거리는 목서 꽃잎이 먼저 읽는다. 지나가는 바람도 읽고, 흘러가는 구름도 읽고, 감나무도 잎을 뚝 떨구며 읽고, 그리고 나서야 내가 읽는다. 시를 읽는 순간 정갈한 시어들이 몸을 파고든다. 노을빛이 스치고 지나간 맑은 개울물 소리 같은 시들이 내 몸 깊숙한 곳에 스며든다. 멋지다. 방안 책상에 앉아 읽었더라면 이렇게 멋진 감흥을 못 느꼈으리라.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속 깊고 단단한 시선과 원숙함이 느껴진다. 너무 비밀이 많고 어려운 시보다 수다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묵하지도 않은 친절한 시들이 좋다.

아직 커피 향이 남아있는 잇새에 넣고 자근자근 시어를 씹으며 가만가만 소리 내어 시를 읽는다. 좋은 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처럼, 나를 들뜨게 한다. 먼저 다가와 쫑알쫑알 말을 거는 어린애처럼 친근하다.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어. 시가 인생이고 삶이란 걸 잊고 살았는데, 시는 때로는 위로가, 때로는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떤 시는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같이, 아니 나보다 더 나다운 말을 절묘하게 찾아 들려준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노래 한 소절에 푹 젖어 가게 앞에 멍청이 서 있듯이.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 중 어느 하나 정해진 답은 없겠지만, 라면 국물에 밥 말아 먹는 것같이 오돌오돌 씹히는 시어가 참 좋다.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한 해변의 노래(Hamabe no uta)를 찾아 연속 듣기를 한다. 가을의 고요와 감성이 첼로에 안겨 낮게 시집에 스며든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감미로운 연주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와 함께 듣는 첼로의 동글동글한 소리가 너무 따뜻하다. 아름다운 음악은 나라가 달라도 느낌은 같다. 일본인 작곡가 ‘나리타’가 1916년에 작곡한 아련한 옛 추억을 느끼게 하는 감각적인 곡으로, 아무리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음악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옛날 외운 시가 지금까지도 머리에 남아있고 입에 붙어있는 게 신기하다. 그 덕분에 몇 줄이라도 글을 쓰지 않나 싶다. 시집은 한꺼번에 읽지 않고 이따금 몇 편씩 입안에 굴리면서 소리 내어 읽는다. 시는 글이 아니라 노래이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시집을 읽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다 보니 시집을 집어 든 경우가 더 많다. 오늘처럼 지인이 보내온 시집이나, 어딘가에서 본 한 구절을 찾느라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구절을 찾느라고 읽게 되는 시집,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좋아서 자꾸만 읽게 되는 시집. 내가 먼저 읽지 못했던 시를 누군가 먼저 읽고 들려주어서 찾게 되는 시집이 더 많다.

시집 전체가 다 좋았던 적도 있지만 몇 편의 시가 좋아서 시집을 소장하기도 한다. 시란 참으로 놀라운 힘을 지녔기에 그 힘의 능력을 믿기에 여전히 시집을 찾고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 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비록 평범한 일상이지만 시처럼 아름답게 살고 싶어서 이기도 하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시는 어려운지도 모른다. 오늘은 친구와 해물 듬뿍 들어간 매콤한 짬뽕에 소주 한잔하고 싶어진다. 시어들의 모임인 시의 맛있는 짬뽕 한 그릇도 함께 먹으며. 앎이 아닌 삶으로 읽는 시의 맛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