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전일광장·이재남>‘훈계’와 ‘학대’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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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전일광장·이재남>‘훈계’와 ‘학대’사이
이재남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정책실장
  • 입력 : 2023. 10.11(수) 12:44
이재남 정책실장
2학기가 시작되는 9월 1일자로 교육부는 중요한 고시를 공포했다.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이다. 이 고시에서는 교원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생활지도의 단계를 제시하였다. 조언-상담-주의-훈육-훈계 순이다. 교원이 할 수 있는 문제행동 중재 수단은 지시, 제지, 분리, 조사, 보관 등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칼 같은 것을 사용하려고 할 때 강하게 몸을 잡거나, 손목을 비틀어 위험물을 빼앗거나, 바닥에 눕혀 몸을 고정하거나 하는 행위가 가능하고, 수업 방해나 문제행동 학생에 대해 교실 밖으로 분리해 복도나 별도의 공간에 일정 시간 분리하는 것도 가능한 범위에 있다고 본다.

이번 고시는 생활지도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면이 있지만, 한쪽에서는 성문화 불가능한 교육의 전인적 영역을 과도하게 규정하면서, 교육의 자율성을 축소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아동 인권이나 복지를 주장하는 단체에서는 특정 직종에 아동학대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제약할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무분별한 신고 체계를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여전히, 교육이라는 이름의 ‘정당한 행위’는 훈계와 학대 사이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어디까지가 훈계이고, 어디까지가 학대인가? 교사의 서늘한 눈빛과 차가운 지시는 훈계인가, 정서적 학대인가. 양 경계를 넘나들며 교육의 영역은 확대되고 있는가, 사이에 끼어서 쪼그라들고 있는가.

재판에서는 ‘정당한 교육행위’의 다툼에는 세 가지 요소가 쟁점이 되는 것 같다. ‘성문화된 교육적 목적이 분명 했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 수단은 폭력성, 방치 등이 과도(고의, 중과실) 하지 않았는가, 다른 지도 방법으로 회피(대안적 노력)할 수는 없었는가?’이다.

교사의 교육행위 정당성의 근거를 일부에서는 학급 내의 규칙이나 보호자 가정통신문이나 교사의 교육철학이 담긴 일정한 메시지 등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교육권이 폭넓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반드시, 아동학대에 대해 매우 민감한 감수성을 전제로 할 때만 정당하지 않을까. 어떠한 교육행위도 학대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전국에서 일고 있는 ‘정당한 교육’에 대한 논란은 자연스럽게 도대체 교육이란 무엇인가? 의 질문을 불러온다.

교육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피터스를 비롯한 교육학자들은 교육과 훈련의 차이를 ‘통제의 정도’를 가지고 가늠한다. 훈련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제한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심신의 통제를 가한다. 반면에 교육은 자기 주도성을 강조하며, 전인적이고, 가치지향적이다. 훈련의 극한 지점에는 학대가 있고, 교육의 극한 지점에는 자율적 인간이 있다. 교육은 휸련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정당한 교육행위의 중심에는 ‘사회적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의 정도는 ‘교육공동체 상호작용의 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