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기념일 브랜드로서 제헌절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기념일 브랜드로서 제헌절
박재항 이화여대 겸임교수
  • 입력 : 2023. 07.12(수) 13:08
박재항 이화여대 겸임교수
제75주년 제헌절을 앞두고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에 경축 현수막이 설치되어 있다. 뉴시스
30대의 언론사 기자 친구들 셋과 7월 중 저녁 약속을 잡으려 노력하는데, 역시나 넷이 모두 가능한 날을 잡기가 힘들다. 그러다 한 명이 7월17일에 하면 어떻냐고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물었다. ‘제헌절 공휴일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고, 바로 제헌절은 노는 날이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제헌절이 유일하게 공휴일에서 제외된 게 2008년이었다. 7월 약속을 잡으려 연락을 한 30대 기자들 모두 고교 시절 이후부터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제헌절에 등교도 하고 출근을 했으면서도 아직까지 공휴일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고 있었다. 어릴 때 심어진 첫 인상, 곧 공휴일로 맞이하였던 제헌절의 기억이 워낙 강하게 각인되었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휴일과 관계없이 일하는 언론계 생활의 여파일 수도 있다.

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군, 즉 카투사로서 군생활을 보냈다. 당시 카투사는 한국과 미국 공휴일을 모두 쉬었다. 한국 공휴일을 맞이할 때마다 미군 책임자에게 어떤 의미의 날인지 설명을 해줘야 했다. 영어로 설명을 해 의미 전달이 부족하기도 했겠지만, 미군들이 가장 납득하기 힘들다고 한 날이 식목일이었다. 나무를 심기 위하여 공휴일을 제정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쉬는 날에 어떤 나무를 심을 것이냐고 물었고, 나무를 심을 계획이 없다는 말에는 그렇다면 왜 쉬느냐고 물어, 쳇바퀴 도는 듯한 질문과 대답의 순환고리가 이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 토요 휴무하는 일자리들이 늘어나면서, 몇몇 공휴일은 기념만 하고 쉬지 않는 날로 바뀌었는데, 그 1번 타자가 바로 식목일이었다. 2006년부터 식목일은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지나치게 노는 날이 많다는 이유에 조림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굳이 하던 일까지 쉬면서 나무를 심을 필요는 없어졌다는 게 덧붙여졌다. 식목일이 앞장서준 덕분에 제헌절의 공휴일 제외는 큰 논란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국경일과 같은 특정한 날도 똑같이 24시간으로 구성된 일년 365일에서 다른 날들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하도록 만든 날이라는 데서, 일종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제헌절이 5대 국경일의 하나라는 사실은 프리미엄의 최상위급이라는 자격을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공휴일에서 제외된 건 어깨를 나란히 하다가 격이 좀 떨어진 느낌을 준다. 헌법 정신과 수호의 참뜻을 경시하는 것 아니냐는 외침이 정치 성향을 떠나 설득력을 갖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반복하는 ‘헌법 제1조’라는 민중가요를 듣고, 헌법을 처음으로 스스로 찾아 읽었다. 만연체의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헌법 전문(前文)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첫 부분에 언급하고, 8차의 개정 직전에 1948년 7월12일 제정되었음을 밝힌다. 여기서 왜 7월17일이 제헌절로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전에는 상식선에서 1948년 5월10일에 총선거를 하고, 거기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만들고, 그해 8월15일의 정부 수립 이전에 발표를 한 날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하필 17일이었을까? 제정 후 공포(公布)까지 준비 기간이 필요했을까?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된 공양왕의 옥새를 받아 새 왕조를 개창한 날이 1392년 7월17일이서 그 날에 맞추었다고 한다. 당연히 7월17일은 음력 기준이고, 양력으로 치면 8월5일이었다고 한다. 갑오경장까지 썼고, 이후로도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음력을 쓰는 이들이 많았던 현실에 비추어보면 자연스럽게 책력을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8월5일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5월10일 선거를 하고, 5월31일 최초 열린 의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헌법 제정이었다. ‘오늘이 온다: 제헌국회 회의록 속의 건국’을 쓴 권기돈 박사의 말에 따르면 청사에 남을 헌법을 만들기 위하여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온 힘을 기울이려는 국회의원들에게, 최고령 당선자로 국회의장이 된 리승만은 “필리핀은 헌법 만드는 데 사흘밖에 안 걸렸다. 우리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하며 다그쳤다고 한다. 원래의 내각책임제에서 국무총리가 있는 어정쩡한 대통령제로 하룻밤새에 바뀌는 상황이었으니, 12일 제정 뒤의 공포까지 5일의 말미를 가지고 간 것도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긴 공백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조선 건국일이라는 연계는 그런 의미에서 제헌절이라는 기념일 브랜드에 아주 긍정적인 역사적 후광을 비춰주었다. 소련의 후원을 받던 북한의 세력과 서로 단독 정부를 세우는 경주에 돌입한 상황에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던 왕조인 조선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효과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 역사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임시정부 헌장과의 연결은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이 만들어진 게 1919년 4월11일이고, 임시헌법을 공포한 날이 그해 9월11일이라고 한다. 조선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을 연결하였다면 훨씬 제헌절의 의미가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는 리승만 초대 대통령과 임시정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과한 바람이다. 임시헌법이 제정되고, 공포되면서 최초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 리승만이었다. 그런데 리승만은 독단적인 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방식을 밀고 나가며 1925년 3월7일 탄핵되는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남게 된다.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는 두 차례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 통과되는데 이미 80~90여년 전에 이국 땅에서지만 대한민국 국회에서 실행했던 것이다.

헌법 전문의 마지막 부분은 ‘1948년 7월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며 그간의 과정을 개략하여 언급한다. ‘8차’라고 건조하게 숫자를 들어 말했지만, 거기에 개인들의 권력욕이 작동하며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흩뿌려지었던가. 제헌절이란 기념일 브랜드에 그런 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우리의 과거 이야기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제헌절이 1948년의 그 한 시점만을 기념하는 게 아닌, 헌법과 관련된 우리들의 역사를 하나로 담는 그런 큰 브랜드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꼭 공휴일로 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국경일로 자리매김하고, 그날 일과를 끝내고 만난 친구들과도 헌법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수도 있을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