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효비야 인문학 강사 |
필자와 미술과의 인연은 여고시절 미대를 진학하기 위해 화실에 나가면서부터였다. 그 때 스승은 ‘노틀담의 곱추’나 ‘한국의 로트랙’이라는 별명 때문에 스스로를 예술혼의 감옥에 가두고 39살로 요절한 화가 손상기였다. 필자 역시 그림에 대한 꿈은 현실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는 미술관은 결핍과 상처에 대한 은신처가 되기에 충분했다. 현재 폴란드 전시관인 ‘10년 후의 그라운드’ 라는 갤러리 간판에 어울리게도 벽면을 의미심장하게 장식한 몇 점의 그림은 평범한 시선으로 감상하기엔 너무 난해한 추상화들이다.
흔히 비엔날레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누어진다. 대중성보다는 현대적이고 전위적인 미술이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인 것 같다. 그러나 필자에게 광주는 비엔날레가 열리기 전에는 정치적으로 정서적으로 편향된 도시라는 선입견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 고백하자면 필자는 미혼시절, 서울에서 고향을 숨기고 직장생활을 했었다. 몇 년 전, 광주문인협회에서 발간한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는 시집에서, 그 당시 나는 누구였는지에 대해 통렬한 뉘우침으로 묘사했던 시를 썼다.
“베를린 장벽보다 높았던 한반도의 헤게모니/보리문둥이와 깽깽이들이 서로 침을 뱉을 때/나는 상것 전라도를 속인 서울 아가씨였습니다/호루라기와 최루탄으로 범람하는 광장의 한 복판 무법천지 난장판에서 지리멸렬한 구경꾼이었습니다/장미와 쓰레기통을 치환하는 카오스의 시대에… (중략)/두레밥상 제비새끼들 입에 넣는 천금 같은 양식으로 시민군 트럭에 주먹밥을 나르던 아줌마들이 이제는 손주들을 앉혀놓고 역사를 증언합니다/칼춤을 추던 잔인한 굿판에서 도망간 겁 많은 영혼들아/부조리한 태양에 다윗처럼 돌멩이와 화염병을 쏘았던 소년들아.” (죽음을 기억하는 비망록 중)
그랬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문화도시 예술도시’라는 슬로건이 유행처럼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광주는 열광했고 필자 역시 비로소 ‘빨갱이 출신’이라는 주홍글씨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신분의 광주인으로 진화하는 데는 시간의 속도가 필요했다. 때로는 일그러진 정치현상의 관습에서 냉소주의자가 되었고, 인권과 평화의 도시라는 주제어가 따라다니는 것도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처럼 눈엣가시로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오월이 아니어도 역사의식이 있건 없건 ‘민주화의 성지’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심장이 뛰는 도시’ 등 거창한 구호에 대한 호기심이 있건 없건, 거리는 카메라를 메고 망월동과 구 도청 항쟁의 현장을 찾는 외국인들과 젊은이와 부모 손을 잡고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탐방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다시 폴란드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그러니까 이번 봄에 아주 아름다운 폴란드 청년을 만났다. 필자가 활동하는 광주문인협회에서는 5·18 국립묘지에서 참배객들과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즉석 시낭송회를 했다. 예상을 넘는 많은 참배객들을 보면서 5월 ‘광주정신’은 우리 지역만의 정서가 아닌 세계화가 되어가는 기억의 역사로써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하여 방문한 관람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숙연하고 비장했다. 그 행사에 참여한 그 청년은 민주묘지 ‘역사에 문’ 앞에 설치된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우리 회원들의 작품집 ‘천년의 혼, 무등에서 백두까지’에서 시 한 편을 펼치고 더듬 더듬 읽어 내려가는 모습은 그 날, 영령들이 잠든 묘지 위에 쏟아지는 찬란한 태양보다 더 눈부시게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었다 . 폴란드에도 불고 있는 한류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가 광주비엔날레 기간에 맞추어 방문했다는 것이다. 광주는 시민과 학생이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여 싸운 과거로의 퇴행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적인 미래지향형의 도시의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그리고 그 청년을 통해 더 이상 폴란드는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광주비엔날레와 5·18 항쟁은 역사와 예술, 과거와 미래라는 평행선 위에서 세계화의 종착역을 향한 기적을 울리며 이렇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이 과거의 눈물이라면 광주비엔날레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앞당기는 환희의 세계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