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당시 이성귀, 문재학, 안종필 열사의 모교인 광주동성고등학교에 추모석과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광주동성고 제공 |
1980년 5월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의 시위 참석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많은 광주·전남 학생들은 신군부 세력을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또 일부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혹은 구하기 위해, 헌혈을 하기 위해 전쟁터 같은 도심으로 모였다. 그리고 군인들의 총칼에 다치거나 숨졌다.
5·18민중항쟁고등학생동지회에 따르면 5·18관련 초·중·고등학생의 사망·부상·구속자는 총 293명으로 이중 33명은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행방불명 상태인 학생을 포함,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중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연소 학생은 양동초 1학년 이창현군이다. 27일 상무대로 시민들을 이송하는 군용 버스에서 마지막 모습이 포착된 후로 행방불명됐다.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국내외로 입양됐을 가능성이 최근 제기되고 있다.
초·중·고 사망자의 경우 고등학생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상업고등학교(현 광주동성고)는 총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하며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 문재학군도 당시 광주상고 1학년에 재학중이었으며, 초등학교 동창인 양창근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에 들어가는 것만이라도 봐야겠다며 도청을 사수했다가 끝내 주검으로 돌아왔다. 양군의 모교 광주숭의실업고(현 숭의과학기술고등학교)도 무려 19명이 항쟁에 참여하면서 광주의 고등학교 중 최다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처럼 처절했던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 군부에 맞섰던 선배들을 위해 일부 학교는 기념비와 추모공간을 마련해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문재학 열사의 모교인 광주동성고다. 동성고는 교내 조성된 추모석 앞에서 매년 자체적인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갖는다.
추모석에는 문 열사를 포함한 3명의 열사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으며 학생과 교사, 교직원들이 5월18일이 되면 묵념과 헌화로 영령들의 넋을 기린다.
광주동성고 관계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희생당한 선배들의 이름이 한자 한자 새겨진 추모석을 바라보며 후배들이 더욱 5·18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된다”며 “추모석, 기념비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역사의식을 높이고 계승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나갈 것이다”고 설명했다.
전남에서도 학교에 다니다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이들도 있다. 전남에서는 영암신북고등학교가 사망자 박찬재군을 포함한 6명이 시위에 나서면서 최다사상자가 나온 곳으로 꼽힌다.
5·18 당시 전남지역 학생들이 희생됐지만, 이들에 대한 유의미한 자료나 연구가 거의 없다. 희생자를 기리는 사업 또한 많지 않다. 5·18단체는 ‘전남 역시 활발히 항쟁이 벌어지던 곳’이라며 희생 영령들을 위한 진실·명예 회복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치수 5·18민중항쟁고등학생동지회장은 “광주항쟁 당시 영암·나주·해남 등에서도 활발한 투쟁이 있었다. 특히 학생들의 활약상이 깊었다”면서 “그간 이들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 공간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어 최 회장은 “민주주의를 위해 결사항전했던 학생들의 용감한 결단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항쟁동안 고등학생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조명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후배들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모교라는 자부심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5·18 학생열사 기념·추모사업 등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인 기자 hyein.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