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95> 기억조차 조작된 죽음 “히메유리 학도단 집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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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95> 기억조차 조작된 죽음 “히메유리 학도단 집단사”
오키나와를 읽다 ② - 히메유리전시관
  • 입력 : 2023. 02.09(목) 12:54
히메유리 전시관 내부
히메유리 전시관 티켓
아침 일찍 숙소 공용 휴게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바깥을 보는데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실은 일주일 내내 나하 시에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미리 확인했다. 이곳도 제주도처럼 하루에 몇 번씩 얼굴을 바꾼다. 다행인지, 내가 가는 곳은 날씨가 내 편인 경우가 많았다. 비바람이 불었지만 맞을 만해서 편의점에서 650엔 주고 비닐우산을 하나 사서 숙소 근처 국제거리에 있는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직원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일일 버스 패스 티켓을 샀다. 1,820엔이다. 2만원 상당의 요금을 하루에 다 사용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 곳이 일본이다. 이곳은 구간이 더해질수록 요금이 올라가니, 장거리를 갈 경우 혹은 여러 번 버스를 탈 경우 버스 패스를 사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버스 패스는 고속버스와 마을버스는 제외된다. 일을 마치고 나서려는데, 30분 전에 산 완전 따끈따끈한 내 새비닐우산을 누군가가 헌우산과 바꿔치기 하고 가버렸다. 찝찝한 마음으로 손때 묻은 우산손잡이를 들어 올리며 오늘 일정이 썩 유쾌하지 않을 거라고 예견했다. 그래도 가야할 곳이 있다. 히메유리전시관이다.
히메유리 전시관 중앙 정원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일본 정부는 미군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오키나와 여자 중등 학생들의 간호교육을 강화하였다. 간호교육뿐만 아니라 내부식민지인 오키나와인을 대상으로 1930년대부터 ‘열등한 오키나와 2등 국민이 아니라 문명화되고 강력한 일본 1등 국민’을 지향하는 황민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천황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오키나와인’이 되기 위한 여러 생활도덕과 규율을 내면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군이 상륙하자 곧바로 9개의 학도 간호대를 편성하여 전장에 배치하였다. 그 중 하나가 ‘히메유리(ひめゆり, 백합꽃의 일종) 학도단’이다. 히메유리 학도단은 1945년 3월 23일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 157명,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학교 학생 65명 총 222명으로 결성되어 오키나와 육군병원에 배속되었다. 오키나와 육군병원에서 히메유리 학도단은 주로 후송 되어온 부상병의 간호, 물 급수, 식사 당번, 죽은 사람의 장례 등을 담당하였다. 전투 상황이 악화 된 5월 하순 경부터는 히메유리 학도단도 미군에 쫓겨 일본군과 함께 섬 남쪽 끝으로 밀려나 동굴에 숨어야 했다. 그때부터는 미군과의 전투에 참여해 병사들에게 탄환을 공급하는 일을 하였지만 결국 6월 18일 포위되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사다코 종이학

‘자수하고 나오면 살려 주겠다’라고 미국군은 설득하였지만 여학도단은 “살아서 포로의 수치를 당하지 말고 군인으로서 깨끗한 최후를 맞이하라”라는 철저히 교육된 전진훈(戰陣訓)을 따랐다. 더욱이 ‘미군이 여자 포로를 강간한다.’라는 교육과 일본군이 중국에서 포로에게 행했던 잔혹한 만행을 익히 알고 있던 그녀들은 미국군도 포로에게 똑같이 할 것이라고 믿었다. 생존해 있던 100여명의 여학도단은 결국 집단사를 강행하였다.
구 해군사령관 전시관

이 죽음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진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고,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할 권리를 빼앗아 갔으며, 생명권마저 거부하도록 만들었고, 마침내 죽음밖에 없는 전장으로 짐승처럼 내몰았던 교육제도가 범한 죄를 고발한다(히메유리 평화 기념 자료관의 건립 기념문 중에서).”라고 하며, 자결이 아니라 집단학살이라고 하였다.
곡괭이로 20미터를 파내려간 구 해군사령관

집단학살을 자행하게 했던 전장 터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시간은 히메유리 전시관을 백합처럼 하얗게 세탁해놓았다. 지형특성상 천연 동굴 40개를 연결하여 임시 야전 병원을 만들어 부상병들을 치료하게 했던 동굴은 전시관과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애도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전시관은 6개로 구성되어있었고 건물 중앙부에는 꽃으로 채워진 정원을 두어 소녀감수성을 살려내었다. 중앙 정원을 중심으로 전시실을 배치하여 발길 따라 가면서 자료들을 볼 수 있게 했다. 아비규환이었던 현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공간을 감성적으로 재구성하고는 무의식적으로 그에 맞게 전시된 콘텐츠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완벽하게 ‘죽음’을 전시해놓은 곳이었다.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위령탑

여전히 일본 정부는 히메유리 학도단의 집단죽음을 적군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가 꽃처럼 아름답게 목숨을 바친, 그녀들의 애국심을 찬미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히메유리 학도단은 하얀 옷을 입은 백의의 천사와 같은, 병사들을 혼신을 다해 치료하거나 황국의 병사로 영광스러운 죽음을 선택한 순결한 애국소녀로 그려내고 있다. 그로 인해 오키나와 사람들이 기억하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강요당한 ‘히메유리 학도단’의 기억은 몰살되었다. 대신 잘 포장된 ‘전쟁에 피어난 한 송이 히메유리 꽃, 히메유리 학도단’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로 오키나와 전투를 상징화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되었던 여학생 간호 부대의 경험은 결코 백합처럼 순결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60년이 넘게 불을 끄고 잘 수 없다고 하거나 부상당한 사람의 입에서 귀로 이어지는 곳으로 구더기가 기어가는 사각사각 소리가 지금까지 들린다며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증언하고 있다. 왜곡된 기억, 황국 신민으로서의 타자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그들은 기억조차 몰살당한 채 자신이 경험한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이 가슴 깊이 묻어 두고 있는 것이 한(恨)으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평화기념공원

이렇듯 전쟁의 끔찍하고 잔혹한 집단사를 잘 포장하는 것은 전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전쟁의 잔혹성을 은폐하여,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이는 새로운 전쟁을 했을 때 여전히 당신은 우리의 희생 제물이 되어달라는 세뇌이기도 하다. 강자는 늘 약자를 찾고 약자가 희생되어야 그들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이 아닌 현재에도 그 법칙은 유효한 듯 하니, 희생물로 배를 불리는, 그들은 누구일까.

차노휘 <소설가 / 도보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