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일자리 노인들 "내일도 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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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공공일자리 노인들 "내일도 일하고 싶습니다"
정부 일자리 축소에 ‘노심초사’ ||노인 77% 만족감…경제적 도움||고령·저소득층 민간채용 불가능||“빈곤 심화로 사회적 위기 우려”
  • 입력 : 2022. 11.01(화) 16:00
  • 강주비 수습기자

지난 26일 오전 9시께 광주 서구 풍암동에서 공공형 노인일자리 중 하나인 '교통안전지킴이'로 활동하는 오종식씨가 교통 지도를 하고 있다. 강주비 수습기자

"단순한 일이라도 이게 내 자부심이고 행복이에요."

지난달 26일, 이른 아침 광주 서구 풍암동 운리중학교 앞에 파란 조끼를 입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공공형 노인일자리 중 하나인 '교통안전지킴이'들이다.

오종식(76)씨는 오늘도 '안전'이 적힌 깃발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8시10분이 되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안녕하세요." 이름도 모르는 학생의 인사 한마디에 오씨의 얼굴이 활짝 폈다.

신호가 바뀌고 오씨가 '가도 좋다'는 의미로 깃발을 쭉 뻗자 아이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오씨는 "아이들이 인사를 너무 잘한다.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하면 그것만큼 보람찬 게 없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학생들에겐 따뜻했던 오씨의 눈빛은 쌩쌩 달리는 차 앞에서 금세 진지해졌다. 학교 앞인데다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 출근·등교 시간이 겹치는 1시간 동안은 '프로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오씨는 말했다.

"차가 신호를 어기거나 과속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경찰처럼 멋있게 (법규를 어기는 사람들을) 잡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죠."

한 달에 10일, 하루 3시간. 오씨가 아침마다 횡단보도 앞에 선 것도 벌써 3년째다.

오씨는 그 3년이 '제2의 삶'이었다고 했다. 건강도 좋아졌고, 이제는 더 없을 것 같던 '새 친구'도 사귀었다.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삶의 의미를 찾기도 했다.

오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릎이 아팠던 오씨의 친구도 이 일을 한 뒤로 금호동에서 풍암동까지 2km 거리를 걸어 올 수 있게 됐고, 자주 깜빡하던 동생은 이제 조원들의 전화번호도 거뜬히 외운다.

공공형 노인일자리의 효과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2020년 시행한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참여자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노인 76.9%가 일자리에 만족했다. 또 89.6%가 '일할 수 있고,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으며, '스스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급여가 경제적 보탬이 되었다', '친구·이웃·직장동료 관계가 좋아졌다' 등의 문항에 70% 이상이 긍정 응답했다.

지난 26일 오전 광주 서구시니어클럽에서 일하는 이옥현(왼쪽)씨와 박영웅씨가 근무 대기 시간에 쇼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강주비 수습기자

그러나 정부는 내년 공공형 노인일자리 6만1000개를 축소하겠다는 방침이다.

'질 낮은' 공공형 대신 '노동' 형태의 민간형을 늘려 노인 일자리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것인데, 고령·저소득 노인들에게 민간형의 문턱은 한없이 높아 반발이 커지고 있다.

광주시에 따르면, 관내 공공형 노인일자리는 2만4059개다. 자치구별로는 △동구 2846개 △서구 4795개 △남구 5193개 △북구 5850개 △광산구 4755개이며, 시에서 별도로 620개를 운영하고 있다.

전남의 경우 4만7336개다. 정부의 방침대로 공공형 노인일자리 약 10%가 감축된다면 광주에서는 2000여 개, 전남에서는 4000여 개가 넘는 일자리가 사라진다.

계약 기간이 한 달 남짓 남은 오씨는 혹여 내년에 일을 못 하게 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는 "내 하루가 '100'이라 하면 이 일이 '90'은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나에겐 중요한 일이다. 여생에도 계속 이 일을 하는 게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했다.

오씨와 같이 일하는 고남식(83)씨는 "노인일자리는 '효자둥이'다. 이 일하면서 돈도 벌고 건강도 더 좋아졌다. 만약 일자리를 줄여서 더 못하게 되면 병든 노인이 많아질 거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옥현(80)씨도 "공공형 일자리 대상인 기초수급자들에게 월 27만원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이 돈으로 가족들한테 손 안 벌리고 차도 마시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사람들과 웃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광주 남구·동구·서구 등 구의회에서는 해당 정책 폐기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잇달아 발표하며 '반대'에 힘을 싣고 있다. 전문가들도 섣불리 노인일자리를 축소할 경우 장기적으로 더 많은 사회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성배 조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공공형 일자리는 '소득 창출'보다는 '복지' 의미가 크다. 이를 자본주의 논리로 바라보면 안 된다"면서 "공공형 일자리를 줄이면 더 많은 노인이 빈곤에 내몰리게 되고 장기적으로도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미 사회적 합의로써 활발히 시행하고 있고 효과도 입증된 일자리를 이제 와 줄인다는 것은 시대적 역행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찬기 빛고을 50+센터장은 "'질 높은 일'을 소화할 수 있는 노인은 소수다. 장년층에게도 하루 4시간 이상 정신적·육체적 노동은 힘들다"면서 "현 체계를 유지하되, 전문직에 종사하며 인생일로(人生一路)를 살아온 노인 등에게는 별도의 맞춤형 일자리를 발굴·제공하는 등 정책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오전 9시께 광주 서구 풍암동에서 공공형 노인일자리 중 하나인 '교통안전지킴이'로 활동하는 오종식씨가 교통 지도를 하고 있다. 강주비 수습기자

강주비 수습기자 jubi.ka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