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물레질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전통가마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어찌보면 김옥수 명장에게 도자기를 빚는 것은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흙이 사기가 되기까지는 불순물을 거르고, 물레 위에서 쉼 없이 다듬어져 사흘 밤낮을 1300도의 가마에서 버텨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도자기에는 만드는 이의 혼과 숨결이 담긴다.
호남 최초의 도예 명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눈 한 번 팔지않고 분청사기에만 집중했다. 48년 동안 들여다봐 온 분청사기지만, 그는 분청사기도, 도자기를 빚는 일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광주와 무안을 오가며 분청사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김옥수 도예 명장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 4대째 도예가 집안 명맥 이어
"지금이야 도예가라고 불러주지만, 옛날에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들은 '점놈', '옹기쟁이'라고 불리는 등 천민 취급을 받아왔던 직업입니다. 그런데 그런건 전혀 상관이 없었어요."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분청사기 도요지에서 4대째 도자기를 빚어온 집안서 태어난 김옥수 명장은 1974년 17세의 나이로 도예에 입문했다.
부친인 고 김종섭 사기장은 김 명장이 도예가의 길을 이어가는 것에 한사코 반대했지만, 도자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김 명장은 "어려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아버지나 할아버지 하시는 걸 보면서 제 업이라고 생각했다"며 "아버지도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아니까 처음엔 굉장히 싫어하셨지만, 제 마음을 아시고는 이내 기술을 전수해주셨다. 도자기는 다른 무엇보다 가마와 불이 가장 중요한데, 아버님이 불을 굉장히 잘 때셨다"고 회상했다.
집터와 작업장이 함께 있는 현재의 '무안요'에는 120년 된 가마와 김 명장이 직접 만든 개량가마 등이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 명장은 "가마야말로 정말 소중한 보물이다"며 "아무리 공을 들여 만든 도자기라 할지라도 불 한 번 잘못 빼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무안에 위치한 '무안요'는 형태를 달리해 광주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김 명장은 지난 1990년부터 광주 동구 예술의거리에서 '무안요'라는 이름으로 카페 갤러리와 체험실, 공방도 운영하고 있다.
김 명장은 "도자기를 만들어 전통을 지키고, 명맥을 이어가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시골에 가만히 앉아서 도자기만 빚고 있는다고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알아주지는 않는다"며 "도시에서도 분청사기를 더 알리고 선보이기 위해 1990년 광주에서 갤러리를 동시에 운영하게 됐다"고 밝혔다.
예술의거리에 위치한 '무안요' 갤러리 카페는 김 명장의 배우자인 박난경씨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시된 도자기를 관람하고 구매할 수 있으며 예약을 통해 도예체험 수업도 진행한다.
박씨는 "2층 전시관에서는 김옥수 명장의 도자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설 전시를 통해 예술의 거리에 걸맞는 작품들을 선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지금은 원교 이광사 선생, 고산 황기호 등의 글씨 원본을 전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분청사기 도요지 무안 가치 알려야"
무안군은 우리나라 3대 도자기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꼽힐 정도로 도예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강진 청자, 여주 백자와 함께 무안 분청사기의 역사·문화적 가치는 매우 높다.
고려 청자 이후 조선 백자에 자리를 내어주기 전까지는 200여년 동안 대표적인 우리 고유의 도자기로 이름을 떨쳤다.
분청사기는 상감, 인화, 음각, 박지, 철화, 귀얄, 덤벙 등 7가지 기법으로 만들어지는데 고려 청자를 만드는 상감 기법과 백자에서 나타나는 철화 기법 등이 혼재해 시기적으로 고려 청자에서 조선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김 명장은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다고 해서 분자회청사기로 불렸고 그것을 지금 분청사기라고 지칭하는 것"이라며 "푸른빛도 아니고 백색도 아닌 잿빛, 회색빛의 오묘한 매력이 있어 질리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소개했다.
청자나 백자보다는 투박하지만, 그만큼 자유분방한 멋이 있고 안정감 있는 실용성으로 생활자기로도 인기가 많았던 도자기였다. 특히 김 명장은 무안 분청사기의 품질이 좋은 원인으로 '흙'을 꼽았다.
그는 "도자기의 경우 그 지역의 흙이 얼마나 좋냐에 따라, 또 도공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는 지에 따라 품질이 결정되는데 무안의 흙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토가 좋기로 유명하다"며 "점토질이 좋을수록 다른 것들이 섞이지 않아 구워냈을 때 백색도가 높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백자의 등장과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왜침을 겪으며 분청사기는 더 발전하지 못했지만, 비정형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매력은 후대까지 이어져 오며 지켜나가야 할 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명장은 "1592년 임진왜란부터 1597년 정유재란때까지 일본에서 우리나라 도공들을 2000명 정도 잡아간 것으로 파악된다"며 "이 시기가 분청사기가 사그라들었던 때와도 비슷한데 지금 일본의 경우 도자기 문화가 굉장히 발달하고 인정받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도자기는 피폐해지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 7전8기 끝 '명장' 칭호
김 명장은 1990년대 광주 진출과 함께 '명장' 칭호를 얻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걸린 시간은 무려 18년. 말 그대로 7전8기 끝에 지난 2008년 호남지역 최초의 대한민국 도예 명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호남지역에 도예 명장이 한 명도 없었다"며 "가문의 영광이었다. 흙과 싸워서 결국에는 이겨야 그 도자기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인데, 명장도 꼭 도자기와 같았다"고 떠올렸다.
지난 2016년에는 무안군에서 무안요 터 옆에 '무안 분청사기 명장 전시관'을 개관하고 김 명장의 작품을 비롯해 지역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유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
현재 김 명장이 전시관을 위탁·운영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현장에서 분청자기의 제작과정을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도자체험교실도 운영한다.
지역 대학과 교육기관 등 다양한 곳에서 200명 이상의 제자들을 배출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지만, 전수자들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은 김 명장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김 명장은 "무안요 공방에서 배출한 인원들까지 하면 적어도 200명 이상 제자를 뒀는데 그중에 지금도 도자기를 하는 인원은 10%도 되지 않는다"며 "젊은 사람들도 일단은 생계 유지를 할 수 있어야 도전을 할 텐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경제적인 부분에 가로막혀 공예 전수가 어려운 상황이 참 안타깝다"고 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현재 무안 분청사기 명장 전시관 내부에 소규모로 마련된 무안 분청 유물 전시관을 독립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김 명장은 "무안에서는 600년 전의 도자기 파편들이 아직도 출토되고 있다"며 "지금은 명장 전시관 내부에 아주 작게 유물 전시관이 마련돼 있는데 살아생전에 무안 분청 유물 전시관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꿈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