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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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호남가
  • 입력 : 2022. 07.19(화) 15:55
  • 이용규 기자
이용규 논설실장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하고 제주 어선 빌려타고 해남으로 건너갈제 흥양돋는 해는 보성에 비쳐있고 고산에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있다.' 서술자가 제주에서 호남으로 건너와 54개 지역을 유람하는 단가 호남가 사설의 첫 머리부분이다. 국창 임방울이 불러 유명해진 호남가에서 함평이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함평(咸平)이라는 지명이 가득하고(咸) 평탄함(平)을 뜻해 최고 태평성대를 꿈꾸는 의미로 본 해석이 많다. 함평은 마한시대에는 모수국, 백제 다지현, 신라 다기현, 고려시대에는 모평현,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함풍현과 모평현이 통합, 함평으로 이름을 바꿨다. 함평은 임진왜란과 을미의병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불의에 용감한 항일 지역이었다. 일제는 3성 3평 사람들이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고 폄훼하기도 했다. 함평 출신 의병장은 죽봉 김태원, 김율형제, 심수택, 박영근, 정희면 장군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을사조약에 반대해 의병을 규합, 대일 저항의 선봉에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한 항일 의병사의 주역들이다. 현대사에서는 대한민국 농민운동에 있어 한획을 그은 함평 고구마사건을 들수 있다. 당시 유신 정권의 기만적 수매정책 농협의 부정행위에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 승리를 쟁취했다. 1930년 암태도 소작쟁의에 이어 농민들이 자기 권리를 투쟁으로 얻어낸 빛나는 역사다. 함평은 전세계 스포츠 대제전인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김원기, 김영남·레슬링) 동메달 1개(노경선·레슬링)를 획득해 국제 스포츠계에서도 빛났다.

호남가의 고장, 함평이 최근 주목을 받았다. 호남가가 세상에 나온 지 200년만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난 9일 함평 엑스포공원 정문 쌈지공원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로 4.2m, 높이 2.2m 돌위에 새겨진 54개 지명에서는 '약무호남시무국가'를 실감케하는 가슴 벅찬 감동도 느껴졌다. 호남가비는 함평출신 향우들이 기획, 실행한 호남을 예찬하는 프로젝트였다. 지난 2월 호남가 첫머리에 등장하는 함평의 자긍심과 호남인의 자부심으로 대동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바라는 향우들의 의기투합으로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명재 전 중앙대 명예교수)가 결성됐다. 서울, 목포, 광주 등에서 거주하는 향우들이 사방팔방으로 홍보에 나서 2개월만에 139명이 십시일반 5000여만원의 뜻을 모았다. 다른 지역 출신 중에서도 호남가비 건립에 공감하고 정성을 보내준 이들도 있어 의미를 더했다. 호남가는 관찰사를 지낸 이서구가 지은 설과 신재효가 재창작했다는 설이 있다. 버전도 7~8개가 되다보니 나오는 지역 표기 한자도 달라 비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한문 연구가의 도움을 받아 429자를 정리했다.

호남가비는 호남을 안내하는 학습판이다. 54개 지역의 풍광과 의미를 갖고 있는 가사속 지명을 훑어보며 선인이 거닐던 여정을 따라가는 것도 즐겁다. 당시 지명과 차이가 나는 곳의 이름을 맞춰보는 재미는 덤이다. 이를 테면 흥양(興陽)이라고 표기한 지명은 고흥이고, '여산석에 칼을 갈아'에서 여산(廬山)은 지금의 익산을 말한다. 여산석은 돌중에서 최고의 품질로 꼽히며 청와대를 비롯한 국가나 공공기관 표지석 설치에 납품되고 있다. 이번 노래비도 익산에서 채취한 돌에 함평을 비롯한 호남인의 긍지를 담았다. 지난 9일 열린 호남가 제막식은 랩과 재즈, 밴드 등 다양한 장르로 호남가를 즐긴 무궁한 문화이벤트였다. 200년만에 세워진 호남가비가 호남인의 화합과 통합을 견인하고, 거드렁 거리고 살아보는 대전환의 무대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이용규 논설실장



이용규 기자 yonggyu.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