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특별법과 천망회회(天網恢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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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여순 특별법과 천망회회(天網恢恢)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 입력 : 2021. 07.27(화) 15:02
  • 박간재 기자
박간재 전남취재부장·부국장
   73년 비극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된 여순사건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담은 특별법이 지난 20일 공포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 이어 국무회의 의결과 문재인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이날 관보에 게재됐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공포 이후 6개월 뒤인 내년 1월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마침내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의 첫 단추가 꿰지게 됐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국군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비롯됐다.

 진압 과정에서 여수·순천·구례· 광양·보성·고흥 등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대 세력에 대한 무제한적 탄압을 제도화 해 강력한 반공 국가를 구축하게 됐다. 여순사건은 그 도구로 사용된 셈이다.

 특별법이 통과된 이튿날인 지난 달 30일 여순10·19특별법제정범국민연대와 순천시여순사건민관협의회 회원들이 순천시 덕연동 여순항쟁위령탑에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길, 이제 시작'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참배 행사를 열었다. 참석한 회원들은 "이런 감격의 날이 올 줄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현재 여순사건 관련지는 대부분 훼손돼 있다. 여수지역의 경우 마래터널 옆에 집단 희생자의 무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순천지역은 사건 관련지가 이미 공원화 돼 있거나 기관이나 아파트가 들어섰다.

 수십여 년 동안 유족을 지원해 온 박소정(62) 여순사건 특별법제정 국민연대 대표는 필자와 한 통화에서 "여순사건의 첫 격전지였던 동천 제방과 장대공원 일원을 주목하고 있다. 미 종군기자 칼 마이더스의 사진에도 멀리 경전선 철교가보이는 제방의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며 "이곳에 많은 시신이 널부러져 있었다는 사진속의 모습이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의 아픈 역사를 생생한 사건의 현장에서 바르고 정확하게 알리는 교육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며 "일부 세력들이 여순항쟁의 순수한 의미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염려된다. 정부와 지자체 등 행정당국에서 명예회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들에 대한 옥석을 가리는데 힘써줄 것을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자, 지자체도 분주해졌다.

 여순사건 담당관을 진즉 공채한 순천시에 이어 여수시도 TF팀 행정 조직을 신설했다.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신고와 희생자 지원, 위령사업을 맡는다.

 고령의 유가족들을 위해 기념공원 용역추진을 서둘러 준공시점을 앞당길 방침이다.

 순천시는 민·관협의체에서 업무를 도맡기로 했다. 희생자 유해발굴과 위령사업을 위해 민·관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으기로 했다.

 광양시, 보성, 구례, 고흥군에서도 희생자 지원 등 힘을 모으기로 했다.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며 화해와 상생을 바탕으로 새로운 통합과 화합의 시대를 열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남도의회와 전남도도 팔을 걷어 붙였다. 전남도의회는 비극적인 역사 현장이나 대규모 재난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역사교훈여행)'을 활성화 시키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지난 19일 이혜자 의원(무안1)이 대표 발의한 '전남도 역사교훈관광 육성 지원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조례안은 역사교훈관광 육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조사 및 연구, 추진사업 지원, 해설사 배치, 활성화 시책 마련 등을 규정했다.

 이번 조례 제정은 전남의 역사자원을 올바르게 전달하고 체계적으로 보존, 활용하기 위한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의원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과거의 암울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다시 기억하고 기념하고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전남도는 올 하반기 시행령 제정 후 전남도 조례 제정·실무위원회를 구성한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 위원장인 김영록 전남도지사를 중심으로 관련 지자체 공무원과 유족 대표, 도의원, 시민단체, 전문가 등 각계각층으로 구성해 다양한 의견을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추모사업도 확대한다. 오는 10월 여순사건 합동위령제를 국가 행사로 승격해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을 건의할 예정이다.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무엇 하나 빠져나갈 수 없다(천망회회 天網恢恢·소이불루 疎而不漏)'고 했다. 도덕경 제73장에 나오는 글귀다.

 인과응보의 원칙을 말할 때 인용되곤 한다. 하늘의 섭리는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 하늘이 하는 일은 인간이 보기에는 난해하다. 그래서 하늘의 섭리는 없거나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고 죄를 숨긴다고,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도, 사라져서도 안된다. 이따금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하늘의 그물은 무엇 하나 빠뜨리는 법이 없다. 죄를 벌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이다.

 국가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폭력한 사실을 73년만에 인정했다. 5·18의 도시 광주, 4·3의 도시 제주처럼 여순사건 역시 되풀이돼선 안될, 뼈아픈 역사를 아로새기는 일. 남겨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몫이다. 박간재 전남취재부장·부국장

박간재 기자 kanjae.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