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은 흥분에 싸여 있었다.
한 편의 영화는 전 국민의 관심을 끌어 모을 만큼 훌륭했고 나의 칼럼 '곡성과 다른 곡성 이야기'는 또 다른 시각으로 곡성을 돌아보게 만든 마중물이 되었다. 칼럼 역시 역발상의 역발상이었다. 영화 <해운대>를 보고 해운대해수욕장이 텅 빌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다는 게 나의 고집이었다.
조용조용 살기만 했던 곡성 사람들은 놀랐다. 어느 블로거는 황정민의 대사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곡성>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분 거여!" 그렇게 영화 <곡성>과 우리 '곡성'은 올 상반기에 가장 뜨거운 국민적 화제가 되었다. 7백만 관객을 끌어들인 영화의 흥행, 23만 관광객이 다녀간 곡성장미축제의 기록에 우리는 흥분했었다.
영화는 극장에서 내려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나홍진, 곽도원, 황정민, 김환희와 함께 떠돌았다. 그러나 우리는 곧 현실로 돌아와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곡성을 찾아 나섰다. 화두는 여전히 '곡성'이었다. 올 여름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을 뚫고 하루 100리를 내달린 자전거투어의 목적지도 결국 '곡성'이었다. 집 떠난 나그네가 되어 나는 자전거에 일용품 몇 가지만 싣고 열흘 동안 골짜기 구석구석 100여 개의 마을을 찾았었다. 끼니를 나누고 잠자리를 같이 하며 마을 어르신들·할머니들의 주름살과 손금 켜켜이 스며 있는 세월을 들었었다. 길은 끝이 없었고 마을에서 만난 분들의 인생 이야기 또한 끝이 없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와 '고향'을 보았다.
'압록귀범(鴨綠歸帆)'과 '대황어화(大荒魚火)'는 곡성 8경의 장엄한 풍경들이었지만 섬진강을 거슬러 돛단배가 들어오는 그림 같은 장면, 횃불을 밝혀 들고 고기 잡는 대황강의 역동적인 모습은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곡성도 조금씩 변해 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향의 원형이 느껴지는 곳이 곡성이다.
봄의 꽃길과 여름의 산맥과 가을의 숲길과 겨울의 강을 따라가면 곡성에 닿을 수 있다. 섬진강변에서, 죽곡 골짜기에서, 산골 암자에서, 산촌 생태 마을이나 외갓집 체험 마을에서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기차마을, 도림사, 태안사, 관음사, 동악산, 섬진강, 대황강, 심청마을, 도깨비마을, 함허정 같은 명소들도 좋지만 골짜기 마을에 서려 있는 고향의 원형이야말로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심청마을 한옥 툇마루에 앉아 추녀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면 누군들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랴. 조용히 지느러미를 흔들며 강물 속에 유유히 정지해 있는 물고기 떼를 바라보라. 사공도 없는 작은 나룻배 하나 강변에서 저 혼자 아침 햇살을 맞으며 은빛 물살들과 도란거리는 광경을 바라보라. 추억이 갇혀 있는 상자의 봉인이 뜯겨지면 어린 시절이 머물러 있는 그곳으로 우리는 기억의 노를 저어가게 된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감동을 잊어버렸던 우리는 이곳에서 비로소 가슴 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기차마을을 찾는 관광객일지라도 곡성에 가면 왠지 고향의 원형을 만날 것 같은 이런 기대감을 우리는 '외갓집에 온 것 같은 포근함'이라 표현한다. 그래서 서슴없이 곡성을 '온 국민의 외갓집'이라고 부른다. 냄비 바닥에 꿈 한 자락 깔아두고 갓 따온 남새와 물을 넉넉히 넣어 하루를 보글보글 조용조용 익혀가는 곡성의 아짐(아주머니)들은 온 국민의 이모인 셈이다. 이모들의 식탁은 흙 속 미생물의 시간, 바람과 비의 시간, 벌레들의 시간, 뿌리들이 빗물 빨아들이는 시간, 농부의 시간, 조리와 숙성의 시간, 음식을 즐기는 여행자의 시간이 혼재해 있는 느림과 성찰의 식탁이다.
잠시 머물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이런 고향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곡성에 오면 사소한 풍경 하나하나에서 그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죽곡의 시인 조태일이 노래했던 것처럼 '작아서 작아서 늘 아름다운 것들, 밑에서 밑에서 늘 서러운 것들'이 우리 마음을 울리는 곳이다. 당신은 고향을 잃어버렸는가. 고향의 원형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곡성으로 오시라. 곡성 어디로 가야 하냐고? 발길 닿는 대로!
이웃 마을 시인 이원규 님의 가락을 잠시 빌려 곡성으로 초대하는 노래를 불러본다.
그러나 굳이 섬진강에 오고 싶다면 /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 섬진강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의문 부호가 머리를 들면 섬진강으로 오시라.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지금 뭣이 중헌가?’ 일상이 꼬여 편두통이 오면 섬진강으로 오시라. 곡성은 언제나 첫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유근기 곡성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