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물의 강인함과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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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물의 강인함과 생명력"
●2023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전 ‘송필용: 곧은 소리’
광주시립미술관서 3부작 전시
'오월광주' 비운의 역사 그려내
물로 치환한 민중의 삶 60점 등
"치유·밝은 미래 향한 염원 표현"
  • 입력 : 2025. 01.07(화) 17:46
  • 박찬 기자 chan.park@jnilbo.com
송필용 작가가 2023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전 ‘송필용: 곧은 소리’ 전시가 열리고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작품 ‘1980.5.18.-금남로’(1986)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찬 기자
송필용 작가가 2023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전 ‘송필용: 곧은 소리’ 전시가 열리고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작품 ‘땅의 역사’(1987)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찬 기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시인 김수영의 시 ‘폭포’의 첫 구절이다. 고흥에서 태어난 송필용 작가는 이 시를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있다. 그는 이 시와 함께 담양 누정에 흐르는 계곡과 금강산에서 마주한 폭포가 어떠한 조건에서도 꿋꿋하게 나아가는 인간과 역사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믿으며 작업을 이어왔다.

2023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전 ‘송필용: 곧은 소리’ 전시가 열리고 있는 7일 광주시립미술관 현장은 역사에 대한 뚜렷한 시대정신이 투영된 작품들로 가득했다.

송 작가는 그동안 우리 땅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림 작업의 과제로 다뤄왔다. 그는 1981년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뒤 1984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배우며 피와 땀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처절하게 싸워 왔던 시대적 질곡을 미술로 관통한 예술가다.

그는 민주화 정신을 기억하고 우리 전통과 사회의 변화에 주목했으며 이에 맞춰 자신의 조형 언어를 꾸준히 탐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 오월 광주를 담은 초기 작품들부터 역사와 민중의 삶을 물(水)로 치환해 제작한 근작들까지 총 60여점을 선보였다. ‘물의 사유’로 귀착한 송 작가의 예술세계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인간·자연·역사가 하나가 되는 경지, 강인한 생명력과 에너지, 상처와 정화, 치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의미를 고찰하게 된다.

1부 ‘지금 여기는 없지만’에서는 1980년대 전라도 ‘땅’과 민중의 모습,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근현대기 민중의 수난사를 생생하게 그려내 다음 세대가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민초들의 삶, 비운의 역사를 겪은 장소들이 그의 수려한 화풍으로 구현됐다. 이 시기 송 작가의 대표작인 ‘땅의 역사’(1987)는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려져 있는 역사화다. 특히 백아산과 황토현의 동학농민혁명을 거쳐,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지역민이 겪은 비운의 역사가 강렬하게 표현됐다. 작품의 근경에서는 전남대학교의 당산나무, 뗏목을 타고 검은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 민중, 황폐해진 토양, 화순 운주사의 와불과 이형탑이 그려져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현대인들의 터전인 도시의 화려한 야간 전경 위에 붉은 가방을 메고 서 있는 어린이가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민중이 겪었던 애환의 역사와 함께 희망찬 미래를 향한 바램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시기 화순 백아산에 새겨진 거친 역사의 흔적을 묵직한 색채로 표현한 ‘땅의 역사-백아산’도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냉전 시대의 이념 대립과 전투가 자주 일어났던 백아산을 배경으로 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마련된 송필용 작가의 아카이브 섹션. 박찬 기자
2부 ‘내 산하에 서다’에서는 1990년대 담양 누정에서 만난 선비의 저항정신과 금강산에서 실감한 민족의 이상적 미학 속에서 역사를 인식하고 공명하는 것에 초점을 둔 작품들이 전시됐다. 이 시기 작품들은 그가 담양 누정에서 발견한 조선 초 문인들의 유가적(儒家的) 저항정신, 인간과 세상을 편안하도록 이끌기 위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선비 정신이 담겨 있다. 1999년 이후 10여차례 금강산을 답사한 후 그곳에 축적된 민족의 예술적 이상과 겸재 정선의 금강산 진경(眞境)에 대해 깊이 공감해 제작한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송 작가는 금강산 폭포의 경이로운 모습을 마주하면서 물에 대한 사유를 구체화했다. 무등산 원효계곡에서부터 마을의 누정까지의 긴 물줄기를 그린 ‘역사가 흐르는 강’(2001)은 낙남한 조선 문인들의 정취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2부 주제와 연관됐지만 출품되지 못한 작품들은 아카이브 섹션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송필용 작 ‘역사의 흐름’(2022). 박찬 기자
3부 ‘빛이 된 물’에서는 재현을 넘어 상처, 치유, 정화, 희망 등 비가시적인 관념의 대상을 흐르는 물의 형상으로 치환해 제작한 작품들이 현장을 수놓았다. ‘물 시리즈’는 역사적 서사를 물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현실의 힘과 생명력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땅의 역사’(1987)의 연장선 위에 있다. 1980년대의 작품에서는 사회적 변화를 향한 민중의 의지가 메시지의 중심이었다면 최근작에서는 역사의 상처에 대한 애도, 치유, 밝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 더 강조된다. 또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실제 역사의 흔적을 사실적으로 재현됐지만, 근작들에서는 역사·민중의 삶과 연관된 관념의 대상을 흐르는 물의 형상, 거친 선, 두터운 물감에 함축해 표현했다는 차이가 있다.

5·18 민주화운동 현장이었던 전남도청 앞 분수대의 현재 모습을 그린 ‘역사의 샘-5·18 민주광장’(2020)은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들을 흰색으로 표현해 ‘새벽-붉게 물든 정화수’(1987)와는 대조적 의미가 담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핏빛으로 물들었던 광주가 시간이 지나 민주·인권·평화를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는 것을 나타낸다. ‘역사의 흐름’(2022)에서는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력한 물의 흐름을 만들듯, 개개인의 역사적 사명이 모여 올바른 역사를 만든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김수영의 시 ‘폭포’의 의미를 새긴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2021)는 햇빛에 빛나는 물줄기를 흰색으로 표현해 역사 속 상처는 역사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정화되고, 정화된 역사는 시공간을 초월해 공명한다는 것을 전한다.

한편 2023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전 ‘송필용: 곧은 소리’는 오는 4월27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본관 5, 6 전시관에서 열린다.
박찬 기자 chan.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