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서 오키나와에 간다고 하면, 오키나와에 다녀왔다고 하면 다들 한 마디 씩 한다. 그곳은 꼭 가봐야 하는데 아직 가보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거나 홍길동이 건설하려고 했던 율도국이 실은 오키나와를 모델로 했다고 하거나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려다가 바람을 잘못 만나 오키나와에 도착했던 적이 역사적으로 많아서 그곳 사람들은 한민족에 더 가깝다거나(피가 섞여서) 제2차 대전 등의 비극을 언급하며 다른 나라와 다른 특별한 애정을 드러낸다. 아마도 지리적으로 인접하기도 하지만 지난한 역사가 인지상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도 한다.
오키나와를 한 바퀴 돌고 돌아 온 소감으로는 허균이 설정한 이상 사회. 즉 <홍길동전>에서 바다 건너 대양의 한 섬으로 표현된 율도국이 오키나와일 수도 있다는 의견에 나 또한 한 표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도국은 현실이 아닌, 수평선 너머의 외딴 신비의 섬으로, 길동의 이상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세계였다. 율도국이 ‘유구국’, 곧 오키나와의 남쪽 섬인 ‘궁미도’일 수도 있다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궁미도에는 몇 천 호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조선에서 온 사람이 그 섬을 정벌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섬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온화하고 온순하여 외부 침입만 없다면 그 자체로도 풍족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다.
소노향우타키석문(1519). 수리문 동쪽에 세운 구국보물 문화재. 세계문화유산. 차노휘 |
길을 잘못 만나 표류했다는 사실 또한 일리가 있었다. 특히 옛날 류큐와 제주도와의 표류민에 대한 상호 호혜적 대응이 기록에 남아 있다. 오키나와대학교 마타요시 세이키요 교수에 따르면 류큐와 조선의 표류민에 관해서 이씨 조선의 역대 기록에 있는 ‘이조실록(1392~1920)’과 류큐국의 대외관계를 기록한 ‘역대보안(1424~1867)’ 등에 적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류큐에서 조선으로의 표류는 제주도에 표착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표류민의 류큐로의 표착은 오키나와 본토, 미야코, 야에야마 등이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두 지역의 어느 쪽의 표류민도 병이 나면 귀국할 때까지 치료를 받으며 옷과 음식을 후하게 대접받았다는 것이다. 류큐 쪽의 사례로는 조선 표류민 여자가 류큐인과 결혼해서 부유해졌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류큐와의 공식적인 교류는 역사가 깊다. 1389년 고려시대에 왜구가 약탈한 조선민을 송환하여 수교를 요구한 것으로 시작된다. 조선 여자의 송환도 있었고 류큐내 왕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류큐인이 한국으로 정치망명을 한 적도 있었다. 양국의 인적 왕래는 이외에도 도공이 류큐에 와서 ‘조선식 도법’ 양식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그 반대로 류큐에서는 배 만드는 기술자가 건너와서 그 기술을 전파하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국가에 통합되기 전 오키나와는 성실하고 인도적으로 공존협동을 지향하고 교류 또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오키나와 인의 온화한 성품과 그들이 일군 문화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 전쟁 전의 오키나와는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23건이나 있다. 그 중 22건은 ‘만국진량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만국진량‘(萬國津梁)’이라는 말은 ‘건너다’와 ‘다리’를 뜻한다. 오키나와에서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진 언어로 여겨져서 일상적으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만국진량’이라는 말이 나온 곳은 옛 류큐왕국의 슈리성 정전에 걸려 있던 ‘만국진량종(萬國津梁の鐘)’에 새겨져 있던 것이다. 이 종은 1458년에 주조된 것으로 옛 왕국의 대교역 시대의 ‘대류큐국’이 전지구적, 전인류적인 세계적 가치를 표기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류큐왕국의 대교역 시대를 만국진량 시대(14~16세기)라고 일컫는다.
오키나와를 떠나기 전날에야 나는 만국진량 종이 걸려 있었다는(현재는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에 있다), 1429년부터 1879년까지 약 450년간 유지되었던 류큐 왕국의 성인 슈리성을 둘러볼 용기가 생겼다. 슈리성은 류큐 국왕과 그 가족이 거주하던 곳이자 왕국 통치의 행정 본부, 제사를 지내는 종교 시설로도 이용되었다. 슈리성과 그 주변에는 예능, 음악, 미술, 공예의 전문가가 많이 모여 살아 오키나와 문화 예술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성은 13세기 말부터 14세기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철거지는 류큐 대학의 캠퍼스로 이용되었으며 1980년부터 시작된 복원 계획에 의해 과거의 위용을 다시 찾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2019년 화재로 중요한 본관(세이덴)이 소실되어 현재 복원을 하고 있다. 과거의 화려한 왕국이 여지없이 화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것이 어떤 복선처럼 내게 전해지는 것이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귀국하기 하루 전 그곳을 방문했고 아주 천천히 성이 위치한 언덕을 올랐다. 운 좋게 돌다다미길을 선택하여 자연석이 보존되어 있는 광경과 울창한 숲길을 통과한 뒤 우아한 성벽을 볼 수 있었다. 슈리성을 둘러싼 성벽은 중국과 일본의 축성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우아한 곡선 형태이다. 정원석 배치 또한 독특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세이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조립식 외벽이 들어앉아 있자 모든 감탄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탄식만 터졌다.
화려했던 시대의 심볼이라고 하는 특이한 색깔과 문양이었다는 목조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간의 경과에 대한 당연한 순리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염원이 아닐까 싶다. 다시 홍길동의 율도국으로 돌아오자면 길동은 서자로 태어나 능력이 있으나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사회에서 살아야 했고 그래서인지 신분으로(사회제도로) 억압받지 않는 그런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토마스 모어는 그것을 유토피아라고 했다. 누군가는 무릉도원이라고도 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이상국가 혹은 이상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염원 같은 것은 시대를 상관하지 않고 갖는 마음이 아닐까.
긍정적으로 본다면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일 수도 있다. 율도국은 왕이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떻게든 하면 만들 수 있는 유토피아. 아마도 실현 가능한 방법을 알고 있어도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해 섣불리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세계가 지닌 한계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여행을 마무리할 즈음 드는 것이다.
차노휘 <소설가·도보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