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여자인데요"… 채팅창의 검은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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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15살 여자인데요"… 채팅창의 검은 유혹
온라인 늪에 빠지는 아이들 ||익명채팅서 미성년자 행세해보니 ||‘ㅈㄱ’, ‘라전’… 성적언동·통화유도 ||온라인그루밍 초등학생부터 노출 ||범죄 연루돼도 신고나 조사 꺼려
  • 입력 : 2022. 10.03(월) 16:41
  • 김혜인 기자

본보 기자가 다운받은 랜덤채팅 앱에서 매칭된 상대방에게 미성년자로 가장해 대화를 하자 음담패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김혜인 기자

"전 남자친구랑 어디까지 해봤어?", "○○ 보여줘", "ㅈㄱ만남인가요?"

본보 기자가 5개의 채팅 앱을 다운받아 14~16살 중학생 행세를 했을 때 1시간도 안돼 받은 메시지들이다.

'슈슈민'이라는 닉네임으로 프로필을 설정하고 간단한 본인 인증을 거쳐 들어가자마자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5개 중 4개 앱은 가입 가능 연령이 20살부터였지만 성인 인증 절차는 따로 없었다.

상대방의 연령대도 다양했다. 10대는 물론이고 최고 57살의 성인 남성까지 앱 상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중 여성도 일부 있었다. 대부분은 나이나 사는 지역을 물어보고 친분을 쌓기 위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은 없는지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점차 수위를 높여갔다. 키나 몸무게와 같은 신체정보를 묻는 것부터 전에 만난 사람과의 성관계 여부까지 대화를 이어갈수록 불쾌한 성적 언동이 심해지기만 했다.

친구 신청을 걸어 수락 후 대화를 이어가는 익명채팅과 달리 랜덤채팅은 무작위로 상대와 1:1로 매칭을 시켜주는 시스템이었다. 다짜고짜 나이를 묻고 수위 높은 대화를 시도하더니 답이 없거나 싫다고 하자 바로 퇴장해버렸다. 중간중간 뜨는 광고창에서는 대부분 음란물이나 성인콘텐츠로 가득 차 있었다. X(닫기) 표시를 잘못 누르기라도 하면 광고페이지로 넘어가는 등 사방이 온통 낯부끄러운 이미지였다.

유명 메신저로 연락공간을 바꾸자는 이들도 있었다. 라전(메신저 '라인'의 전화), 오카(오픈 카카오톡) 등 각종 은어를 써가며 재밌는 이야기, 깊은 고민들을 나누자는 취지로 제안을 받기도 했다.

본보 기자가 다운받은 익명채팅 앱에서 상대방에게 미성년자로 가장해 대화를 하자 음담패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김혜인 기자

SNS, 각종 채팅 앱, 모바일 메신저 등이 아동·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노출 경로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아이들을 유인해 길들임으로써 동의한 것처럼 가장해 성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를 뜻하는 '온라인그루밍'은 중학생 10명 중 2명이 노출될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 3월 발표한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 현황 및 대응방안 연구'에 따르면 오픈채팅 참여 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비중은 19.6%에 달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온라인그루밍에 노출된 경험이 초등학생부터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연구 결과 온라인그루밍 노출 경험이 초등학교는 5% 내외, 고등학교에서는 최대 14%까지 높아졌으며, 여자 청소년들은 중학교 이후부터 10% 이상이 낯선 사람으로부터 기프티콘을 받는 등의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아동·청소년들이 이 같은 채팅을 통해 범죄에 노출된다는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김상아 광주해바라기센터(아동) 부소장은 "가해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관심분야를 통해 주로 애정관계를 형성한다. 게임, 연예인 등의 관심사를 공유하며 친분을 과시하면서 성희롱, 성착취 등이 이뤄진다 해도 피해자는 일탈 행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며 "특히 친근감을 쌓기 위해 또래로 위장하는 사례가 많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진술할 때 '중학생 언니라고 했어요', '초등학교 남자아이였어요'라고 하지만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대면범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남아있는 증거가 익명 상의 대화뿐이기 때문에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친분을 쌓은 뒤 벌어지는 성착취에 대해서도 아동·청소년의 특성상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의 어려움으로 꼽힌다. 이미 가해자와 친해진 사이에서 막상 신고와 처벌을 진행하려니 '죄책감'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김 부소장은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특히 수치심보다 '내게 잘 대해줬다', '친한 사이다' '나도 동의했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생긴 신뢰를 깨고 싶지 않은 마음, 즉 죄책감에 피해상황을 이야기하도록 설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고 덧붙였다.

이어 김 부소장은 "일반인에게는 채팅에서의 대화와 온갖 달콤한 공세로 아이들을 나쁜 길로 유도하려는 맥락이 보이지만 청소년들은 아직 이를 구별할만한 능력이 부족하다. 끊임없이 피해 예방을 위한 교육을 통해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며 "대면범죄는 죄질이 크다고 인식하지만 그에 비해 아직까지 온라인상의 범죄는 (대면범죄 만큼이나) 인식이 잡혀있지 않다. 온라인그루밍은 어떤 범죄로든 이어질 수 있는 사전단계다. 이를 경계하고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전했다.

김혜인 기자 kh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