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쟁의 주도'… 신문서 발견한 조부 이름 석자 '조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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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소작쟁의 주도'… 신문서 발견한 조부 이름 석자 '조상수'
●신안 농민운동 현장을 가다||(4)도초도, 항일 공동체 정신의 고장||조도일씨 “조부 중심 돼 소작인회 구성”||소작쟁의 관련자 21명중 3명 서훈 통과||할아버지 수감 기록 없어 서훈 못 받아||"기록 본 것으로 행복… 명예회복 노력"||신안군, 농민운동 기념탑 설립 등 추진
  • 입력 : 2022. 08.04(목) 16:57
  • 정성현 기자

지난달 29일 도초면사무소에서 신안농민운동 도초도 소작쟁의를 주동했던 조상수의 손자 조도일 씨가 할아버지가 소개된 신문을 보여주고 있다.

1956년생인 조도일 씨는 할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태어난 다음 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부모에게서 "암울한 시대, 생전 고문으로 수난을 겪었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1982년 발행된 한 신문에서 할아버지 이름 석 자 '조상수'를 봤다.

"1925년 도초에서 …조상수 등이 중심이 되어 소작인회를 결성했다. 이듬해 9월 소작인회는 청년회관에서 300여명의 소작인들과 함께 소작료 부당징수 거부를 결의한 후 그해 소작료를 지주들에게 납부하지 않고 마을 앞에 야적시켜 놓은 채 지주들에게 소작인들의 결의를 통보했다."

평생 농사짓는 법만 배웠던 조 씨는 "도초의 농심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다른 섬에 비해 도초의 소작쟁의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며 "젊은 날 수배돼 도망 다니느라 이름도 없이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를 위해 도초 명예가 하루빨리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씨는 도초 항일농민운동의 정신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이 염전이라고 했다. 도초도 주민들의 공동자산 격인 '염전'을 마련하고 수익금으로 마을에 중학교를 만들었다. 주민들의 공동체 정신은 1920년대 소작쟁의 활동을 통해 기틀이 마련됐다고 믿는다.

조 씨는 "1950년대만 하더라도 섬에 학교가 없었다. 마을 주민들이 땅을 개간해 염전 50정보를 마련하고 수익금으로 학교를 만들었다"며 "이후 주민들은 교육청에 기부채납을 했고 지금의 공립 도초고등학교가 됐다. 작은 섬에 정원 200명 기숙형 자립고가 있다는 것은 주민들의 자랑이다. 도초가 다른 섬의 소작쟁의보다 공동체 정신이 크다는 의미다"고 전했다.

신안농민운동 도초도 소작쟁의를 주동했던 '조상수'의 이름이 짧게 소개된 기사.

신안 도초도는 예로부터 고란평야 중심으로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토지 소유권이 지역의 유지들뿐 아니라 일본인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도초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한 1920년대, 도초도 토지는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가 함께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항에서 벌어진 도초도 소작쟁의는 항일운동의 성격을 띠게 됐다. 이들의 소작료 인하 요구는 생존권 투쟁을 넘어, 식민체제에 반하는 농민 항일민족운동이었다.

도초도 소작인회는 1924년 창립돼 회원 숫자만 400여명이 넘었다. 1926년에는 농민조합으로 단체 규모가 커졌으며 불납동맹을 통해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지주들의 요청으로 추진된 두 차례의 불납소작률 가차압 집행 시도를 단체 행동으로 막아냈다. 도초도 소작쟁의에는 최대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동참했다.

특히 도초의 경우 지주들이 자체적으로 '다도농담회'를 만들어 주민들의 소작쟁의 활동으로 방해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문재철·윤영현·중도청태랑·시야장작·금정풍마 등이 그 중심에 있었는데, 말이 지주들의 조합이지 사실상 소작쟁의 활동을 방해했다. 다도농담회는 도초도 소작쟁의가 격화되는 배경이 됐다.

단체행동의 규모가 커지자 당시 목포경찰서는 무장경관대를 조직하고 도초도를 습격해 소작인회 간부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목포경찰서 앞에서 단체로 원정 투쟁을 진행했다. 원정 투쟁의 목표는 석방이었으며 참여에 남성, 여성은 구분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도초도 소작쟁의에 참여한 주요 인물을 65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도초도 소작인회 회장 김용택과 여러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상희 등이 중심인물이다. 이들의 투쟁의식은 매우 강했다. 농민들은 특정 지주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지주를 포함한 다수의 지주와 맞서야 했고 또 도초를 습격한 일제 경찰들 상대로도 항거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소작쟁의는 단순히 지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치하의 사회문제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전개된 항쟁이었다.

조 씨는 "할아버지가 당시 수감기록이 없어, 비록 서훈을 받지 못했지만, 할아버지 이름 석 자가 그렇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맘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도 할아버지 덕분이었다"며 "3년 더 있으며 도초에서 소작쟁의가 벌어지는지 100주년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쉽게도 도초에 소작쟁의를 기념할만한 비나 장소가 없다. 신안농민운동기념사업이 첫 삽을 떼면서 도초에도 기념비가 세워질 예정이다. 명예가 하루빨리 되찾아지길 고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도초도 소작쟁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 주요 공간에 고증이 필요하다. 현재 도초에서 총회가 열린 소작회관, 청년회관 등의 장소를 추정하기 어렵다"며 "현재 도초도에 일제강점기 소작쟁의 기념탑이 건립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추진 중이다"고 밝혔다.

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신안농민운동으로 독립유공자 지정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관련 수감자 116명 중에서 도초도 소작쟁의 관련자는 21명이다. 116명의 목록은 신안군이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기 전 기초조사를 목적으로 진행한 연구용역 결과에서 가져왔다.

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가 지정한 도초도 소작쟁의 관련자 21명 중 3명이 지난해 대통령 표창으로 서훈을 받았으며 13명이 서훈 신청 단계에 있다. 나머지 대상자는 '후손을 찾는 과정'이라고 했다.

한편 신안군 문화관광과도 신안농민운동기념관 및 기념탑 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념탑의 경우 올해 안으로 7억원의 군비를 확보할 예정이며 현재 기념탑이 없는 도초면, 자은면, 압해도 매화리(매화도), 지도 등 4개 섬에 세워질 전망이다. 기념관은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최대 50억원의 예산 확보를 목표하고 있으며 건립 예정지는 농민운동이 시작된 암태도가 거론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신안군 도초도 전경. 신안군 제공

정성현 기자 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