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필영 시인 |
사람을 위한 편안한 환경들은 자연에 기대어 사는 생명들에게 변화를 강요한다. 그들 중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들은 조금 더 바이러스에 강할지 모르나 인간과 가까이 사는 생명들은 바이러스에 약하고 바이러스를 옮기는 숙주가 되기도 한다. 지구의 모든 사람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도 숙주가 무엇이든간에 인간의 지나친 파괴와 욕심에서 기인했다고 보고되고 있다. 다시 비둘기 얘기로 가보자. 산에서 쫓겨난 비둘기들은 도시에서 고가도로나 육교 밑에서 산다. 그곳은 매연과 미세먼지로 가득한 곳이다. 당연히 비둘기를 포함한 그곳의 모든 생명들은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걸리거나 보균 상태가 될 것이다. 미세먼지가 모든 생명에 치명적이라는 것은 호흡기뿐만 아니라 치매나 뇌질환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는 미세먼지를 줄이면 치매환자의 5%를 줄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 미세먼지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지만 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에 의해 병에 걸린 비둘기나 고가 밑에 사는 생명체들을 기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부동산값은 치솟고 발 빠른 사람들이 매일 개발현장으로 몰려다니는 현실은 당장 이익과 편리를 가져올지 모르나 이후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이성은 잘 알고 있다. 현실 가치와 미래 생존의 이중성을 안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자연 파괴가 생명체의 변질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닌지? 영국의 시인 존 던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히 섬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이다....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문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헤밍웨이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소설 제목이 되었다. 헤밍웨이는 개인에게 닥친 불행과 사회적 폭력과 억압을 연대적으로 극복하려는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우리의 존재 이유를 환기시킨다. 유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교회에서 조종을 울렸다. 누가 죽었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는 이유는 죽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연대 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요소가 나와 연결되어있다는 존 던의 오백년 전 고백은 요즈음 더욱 의미심장하게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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