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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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칼럼
편집국에서>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진상규명
박성원 편집국장||80년 5월 ‘내란수괴’ 누명 사형 선고||2004년 ‘검찰 수사기록’ 공개 이끌어||필자, 취재기자로 함께 열람한 인연||핵심자료 누락 ‘빈껍데기’ 공개 좌절||16년 지났어도 그날 진상은 베일 속||‘5·18 진상 밝혀졌다’ 기사 쓰게 되길
  • 입력 : 2021. 05.17(월) 16:14
  • 박성원 기자 swpark@jnilbo.com

박성원 편집국장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지난 12일 취임했다. 필자가 5·18 취재기자 시절 정 이사장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컸다. 정 이사장은 5·18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그는 전남대 복학생협의회장이던 1980년 5월 신군부의 무자비한 고문 속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수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82년 12월 성탄절 특별사면조치로 석방될 때까지 5·18 관련 구속자 중 가장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석방된 후에는 5·18 진상규명에 앞장섰다.

필자가 5·18 취재를 위해 정 이사장을 만난 건 2004년 12월이었다. 당시 언론의 5·18 보도 대부분은 매년 5월18일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이뤄져 12월은 이른바 '비수기'였는데, 2004년 겨울엔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바로 검찰의 '12·12-5·18 수사기록 공개'였다.

당시 5·18 피해자와 유족들은 검찰이 12·12 관련자에 대한 1994년 10월 기소유예 처분과 5·18 관련 피고소인·고발인 전원에 대한 1995년 7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릴 당시의 수사기록 공개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5·18 관련 검찰 수사기록과 군(軍) 자료를 입수하면 최초발포명령권자, 양민학살, 암매장, 헬기 사격 등 5·18의 핵심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국익과 사생활을 침해한다며 한사코 기록 공개를 거부한 검찰에 맞서 정동년 이사장은 6년여의 끈질긴 수사기록 정보공개청구 소송 끝에 '검찰이 12·12 및 5·18사건과 관련된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한 처분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검찰이 마지못해 총 30만쪽 중 5만여쪽의 수사기록을 내놓은 때가 2004년 12월이었다.

5·18 취재를 담당했던 필자는 조바심이 났다. 검찰이 넘겨준 수사기록을 하루라도 빨리 확인, 보도해야 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평소 5·18 취재를 하면서 친분을 쌓은 5·18 유족회 관계자의 주선으로 수사기록검증위원장을 맡은 정동년 이사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필자의 취재 의지를 높게 샀는지, 수사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허락했다.

취재 당일 사회부 데스크와 선배기자들은 필자에게 다른 취재업무는 모두 제외해주는 대신 5·18 진상규명에 한 획을 그을만한 '큰 건 하나를 물어와야 한다'며 격려해줬다.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정 이사장과 5·18기념재단 자료실 한켠에서 이틀동안 수천장의 5·18 수사기록을 확인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급기야 엄청난 분노가 일었다. 말 그대로 빈 껍데기뿐인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5·18 최초 발포명령권자와 강경 진압 및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밝힐 유일한 단서로 지목된 군 작전일지와 전투상보, 지휘관 회의록 등 핵심기록은 아예 공개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나마 공개된 자료도 제목만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검은색 사인펜이나 시커먼 먹지로 덧칠이 돼 있었다. 첫 페이지 제목을 보고 기대감에 들춰보면 상황기록, 보고내용, 당사자 진술 등은 어김없이 가려져 있었다.

여러 기록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자료는 '헬기 출동 항공지휘관의 보고내용 및 증언'이라는 제목의 군 문건이었다. 제목만 있고 상세내용은 먹지로 가려져 있었는데, 원본이 공개됐다면 최근까지도 논란이 된 헬기 사격 여부와 사체 이송과정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아쉬웠다.

5·18과 관련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보도하겠다는 취재 목적은 이루지 못한 채 검찰의 5·18 핵심자료 누락을 비판하고 추가 공개를 촉구하는 연속보도밖에 할 수 없었다.

그후로 16년이 훌쩍 지났다. 바뀐 것은 없다. 여전히 5·18의 진상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누가 맨 처음 발포 명령을 했는가를 밝히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전두환 등 신군부 실세가 명령권자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근거를 찾아야 한다. 행방불명자 규모와 처리, 암매장 여부 등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누구 못지 않게 5·18 진상규명 과정에서 많은 좌절을 맛봤다. 2004년 5·18 수사기록과 자료를 보며 느낀 절망감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때마침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사 1년을 맞아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등 진상규명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5·18기념재단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비롯해 5·18 유관 기관·단체·관계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80년 5월 그날의 진실을 밝히는데 최선을 다해주길 당부드린다. 전남일보도 힘을 보태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필자가 16년 전 쓰지 못한, '5·18 총체적 진상, 드디어 밝혀졌다'는 제목의 기사를 쓰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래본다.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취임식.

박성원 기자 swpark@jnilbo.com sungwon.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