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5·18 방명록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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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시기·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5·18 방명록의 정치학'
각오·적통강조·사죄 등 다양||정세균, 방명록에 비전 적어||DJ, 2006년 첫 대통령 방명록
  • 입력 : 2021. 04.28(수) 17:03
  • 최황지 기자

역대 대통령들이 국립 5·18민주묘지 방명록에 남긴 글귀. 그래픽=서여운

민주주의의 성지 국립5·18민주묘지는 정치인들에게 호남 구애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5·18묘지는 중대사를 앞두고 정치적 결의를 다지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민주당의 적통성을 부여받는 상징적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일부는 역사적 과오에 따른 사과를 위해 묘지에서 고개를 숙인다. 정치인들의 의중은 민주묘지에 마련된 한쪽짜리 방명록에 고스란히 담긴다.

● 각오형·적통 강조·사죄형 다양

28일 대권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호남 출신'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오랜만에 광주를 찾았다. 출마를 공식 선언하진 않았지만 그가 남긴 방명록에는 차기 대선을 위한 결의가 담겼다. '위기 극복에 함께하시는 국민여러분, K-회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일상회복, 경제회복, 공동체회복 꼭 이루겠습니다'라는 방명록이 슬로건처럼 읽힌다.

5·18묘지를 방문하는 시기와 방명록에 남긴 글은 상관관계를 갖는다. 4·7재보궐선거를 앞둔 지난 3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로 선출된 다음날 곧바로 광주를 찾았다. 방명록에는 '5·18정신으로 무너진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재보선 승리를 위해선 수도권의 호남 지역민들의 지원이 필요한 만큼 상징적으로 지지를 호소한 것이다.

당대표에 도전하는 더불어민주당 세 명의 후보자도 5·18묘지 방명록을 통해 정책 슬로건을 내걸었다. 홍영표 의원(5월의 빛나는 정신과 역사를 받들어 개혁을 완성하고, 민주주의를 반듯이 지키겠습니다), 송영길 의원(5월 정신을 계승해 민생을 수호하고 제4기 민주정부 반드시 만들겠다), 우원식 의원(민생으로 정면돌파! 민주정부 지키겠습니다)이 직접 쓴 각각의 방명록에선 정권재창출, 개혁, 민생 등의 키워드가 보인다.

민주주의 적통성을 계승하기 위한 의도로 5·18묘지를 다녀간 정치인도 있다. 호남과의 인연을 강조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방명록이 대표적이다. '나의 사회적 어머니 광주, 언제나 가슴 속에 있습니다'라며 광주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방명록을 통해 5·18영령들을 추모하고 사죄와 반성의 뜻을 남긴 인물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는 최근 비공개로 방문해 '5·18 영령들을 마음 깊이 추모하며 광주의 정신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 피우는 대한민국을 염원합니다'라고 적었다. 역사적 책임을 직시하는 듯 또박또박한 글씨체가 눈에 띈다.

● 친필 남긴 역대 대통령 5명

5·18묘지를 찾은 전·현직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오월영령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28일 국립 5·18민주묘지관리소에 따르면, 지난 2006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2017년 문재인 대통령까지 모두 5명의 전·현직 대통령 방명록을 보관 중이다.

첫 방명록은 지난 2006년 6월 16일 퇴임 뒤 5·18묘지를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라고 써 오월정신의 계승을 기원했다.

이듬해인 2007년 5월 22일에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처음으로 5·18묘지를 찾아 동백나무를 심고, 방명록에 '眞實·自由·正義'(진실·자유·정의)라는 글귀를 새겼다.

그해 17대 대선에 출마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두 차례 5·18묘지를 찾았다. 후보 확정 전인 5월 13일에는 '5·18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화합과 번영의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적었고, 대선 후보가 된 이후인 10월 22일 재차 방문해 '반드시 경제 살리고, 사회통합 이루어 님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살려서, 크게 보답하겠습니다'고 적었다.

해마다 5·18기념식을 거르지 않고 참석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직후인 2008년 4월 20일 묘지를 찾아 '강물처럼'이라는 글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두 차례 남긴 방명록에서 '광주 정신'을 헌법에 싣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대선 후보 시절인 2017년 4월 6일에는 '광주 정신을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라 적었고, 당선 이후 치러진 제37주년 5·18기념식 때는 '가슴에 새겨온 역사, 헌법에 새겨 계승하겠습니다'고 기록했다.

● 방명록 '이모저모'

2017년 4월에 글을 남긴 김부겸 당시 국회의원의 방명록.

방명록을 작성하는 정치인들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만큼 간혹 그들은 오자를 남기는 실수를 한다. 2017년 4월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는 대선 후보로 광주를 찾아 방명록에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적었는데 이때 '사사로울 사'(私)를 '죽을 사'(死)로 썼다.

현재까지 5·18 방명록에 가장 긴 글을 썼던 정치인은 2017년 4월 14일에 9줄을 작성한 김부겸 당시 국회의원이다. 가장 짧은 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물처럼'이다.

정치인들의 결의, 각오, 사죄 등이 담긴 방명록은 매년 약 100건에서 많게는 200건이 작성되는데 5·18관리소 측이 모두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또한 연말께는 한꺼번에 취합, 디지털화하는 작업도 거친다.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방명록을 통해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비공개로 방문,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꺼리는 주요 인사들도 있다. 5·18관리소 관계자는 "지난해 코로나19가 창궐했을 때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왔다가 갔다. 조용히 왔다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것을 피하더라"라며 "비공개로 왔더라도 관계소 측이 먼저 알고 다가가 방명록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황지 기자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