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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휼전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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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휼전칙

게재 2020-10-25 17:15:33

조선 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정조(正祖)는 세종에 버금가는 애민군주였다. 몸을 낮춰 백성들과 소통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행차 중에도 빈천을 가리지 않고 격쟁(擊錚)과 상언(上言)에 귀를 기울였다.

능행차가 있는 날에는 반드시 침전에 들기 전 백성들의 원망을 다시 한번 살폈고, 사흘이 지나기 전에 상소를 처리했다.

"나는 상소문을 읽는 것이 소설을 읽는 것보다 재미있다. 백성이 배고프면 나도 배가 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가 부르다"라는 정조의 어록에는 평소 그가 민생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정조는 부모 잃은 아이들을 애틋하게 여겼다. 11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었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도 수년간 떨어져 살았기에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때문에 힘 없고 홀로 남은 아이들은 국가가 책임지고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철학은 흉년을 당해 걸식하거나 버려진 아이들의 구호 방법을 규정한 법령집인 '자휼전칙(字恤典則)'에 반영됐다.

자휼전칙에는 10세 이하의 구걸하는 아이들과 3세 이하의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절차와 방법들이 명시돼 있는 아동복지정책이다. 10세 이하의 걸식아동들을 진휼청에 보고하면 이곳에서 아이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조치했다. 빈터에 흙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고 병에 걸리면 혜민서에서 치료해 주었다. 갓난아이의 경우 유리걸식하는 여인 중 젖이 나오는 이를 택해 한 사람에게 두 아이씩 나누어 맡도록 했다. 또 이 여인들에게도 쌀 1되4홉과 장 3홉, 미역잎 3입씩을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자휼전칙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선진적인 복지정책이었다.

정조는 한문으로 쓰여진 자휼전칙을 훈민정음으로 다시 옮겨 팔도에 배포했다. 누구나 그 내용을 쉽게 숙지하고 이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조는 대신들과의 경연에서도 자휼전칙이 잘 이행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했다고 한다.

최근 발생한 인천 '라면 형제' 사건은 돌봄서비스 공백이 가져온 비극이다. 매년 아동 방치·학대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법과 시스템이 보완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의 돌봄 사각지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대책'이라고 하는 법과 제도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급조돼왔기 때문이다.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땜질식 처방은 또 다른 '라면 형제' 사건을 불러올 것이다. 탁상행정이 아닌 현장행정이 절실하다. 지극한 애민사상이 깃든 정조의 자휼전칙이 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