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초기진압 실패, 광주 '강경진압'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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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부마항쟁' 초기진압 실패, 광주 '강경진압' 이어졌다
보안사 작성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교훈’ 문건 공개 ||초기에 즉각 기동대 투입·‘편의대’ 운영 필요성 강조
  • 입력 : 2019. 12.08(일) 19:15
  • 김정대 기자
부마항쟁 직후 국군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부마지역 학생 소요사태 교훈'. 대안신당 제공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초기진압에 실패한 군 수뇌부가 이후 발생하는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과 민간인으로 위장한 선무공작부대인 '편의대'를 투입하는 등 대책을 세운 정황이 담긴 문건이 나왔다. 부마항쟁에서의 '교훈'은 이듬해인 1980년 5월 광주에서 신군부의 무자비한 강경진압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국군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부마지역 학생 소요사태 교훈'(이하 부마사태교훈)에 담겼다. 해당 문건은 지난 5일 대안신당(가칭)이 공개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 보안사 생산·보유 문서 및 자료 2321건에 포함됐다. 총 55쪽 분량의 부마사태교훈은 '소요사태에 대한 군 조치사항', '계엄군 및 위수부대 조치' 등을 통해 79년 10월16일부터 같은 달 20일께 마산 위수령으로 수습이 되기까지 군 병력 투입과 운용을 비롯해 사태 발생 원인, 유언비어, 교훈 등을 분석·정리하고 있다.



 작성 시점은 부마항쟁이 마무리되고 난 뒤인 10월21일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0월26일 사이로 추정된다. 특히 10월22일 부마항쟁 관련 고위급 대책회의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부마사태교훈에 담긴 내용이 언급됐다는 기록이 남아, 항쟁 직후 곧바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보안사는 부마항쟁의 발생 원인에 대해 지역 출신 국회의원 김영삼의 제명으로 인한 동정심, 재정긴축과 경기침체 등으로 인한 일부 시민의 불만 누적, 학생들의 감상적인 초보적 민주주의 이론 추구, 대학가의 경쟁적 심리 등을 언급하면서 "국가 전체적인 면에서 큰 문제는 없었음"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초기진압에 실패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질타했다. △관계기관의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 △학원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으로 극심한 정보 부재 현상 기인 △대비책 및 방법의 미숙으로 소요를 진압치 못하고 혼란을 가속화시키는 결과 초래 등을 원인으로 봤다.

 부마사태교훈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교훈' 대목에는 이 같은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여기에는 △평소 문제 학생들에 대한 첩보 및 수사활동의 결여 △소요사태에 대비한 단계별, 책임 구역별 진압계획 미강구 △초동 단계에서 즉각 기동대 투입 및 강경한 조치 미흡 등이 적혔다.



 차후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소요사태 진압시 유의사항'에는 교훈이 반영됐다. △출동 부대는 고도로 훈련, 견제 유지로서 일사불란한 지휘 체제 확립 △초동 단계에 신속 진압(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 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서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함) 등 강경진압을 암시하는 대목이 들어갔다.

 특히 '후방 사태 대비' 항목에는 △방화 총기 및 폭발물 사용 파괴와 함께 △소요 도중 주위에 편의대 운용이 기재돼 군 내부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선무공작부대인 편의대 투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18 관계자는 "부마항쟁 당시 박정희 정권과 군부는 초기에 진압에 실패해 사태가 장기화, 확산됐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교훈'으로 삼아 전 군에 널리 확산시켰으며, 결국 광주에서 강경진압에 나서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김정대 기자 nomad@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