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송호영당, 순창 삼인대-눌재 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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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연의 문향
광주 송호영당, 순창 삼인대-눌재 박상
||도도히 흐르는 의향 호남의 뿌리 ||목숨을 걸고 시대의 불의에 항거
  • 입력 : 2019. 03.28(목) 14:11
  • 편집에디터

'강천(剛泉)의 맑은 물은 동쪽으로 우렁차게 흘러가고/ 온릉의 울창한 나무는 북쪽을 바라보며 푸르고 푸르네/ 비석은 닳아 없어져도 선생들의 이름은 끝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순창 강천산 '삼인대(三印臺)' 얘기다. 삼인대는 도장 3개를 걸어둔 누대라는 뜻이니, 비석은 닳아 없어져도 이름은 끝내 남을 것이라는 그 사연이 자못 비장하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중기 중종반정 무렵이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반정공신들은 중종의 본부인(元妃) 신씨를 폐출한다. 신씨의 아비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다. 새 왕비로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장경왕후가 된 윤씨는 10년만에 원자를 낳고 사망한다. 연산군의 폭정과 두 번의 사화와 반정이라는 대정변을 겪고서, 공신들의 발호로 왕권은 미약하고 민심은 안정되지 않았는데 장경왕후의 죽음과 잦은 재해가 일어나자 중종은 관례에 따라 전국 조야에 언론을 구하는 명을 반포한다. 이 소식을 듣고 담양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인 것이다. 그들은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었다.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그 절의와 기개를 기려 이곳을 삼인대라 부른다. 관인을 나뭇가지에 건다는 것은, 직은 거는 비장한 세레모니인 셈이다. 근간 문재인 대통령이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사건에 조직의 명운을 걸고 밝혀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여기서 쓴 상소가 '삼인대 상소'로 더 알려진 <청복고비신씨소>이다. 중종 반정으로 폐위된 고비(故妃) 신씨를 복위하고 반정 초기 왕을 윽박질러 무고한 신비를 폐출한 반정공신들을 단죄하라는 것이니,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정면도전이 아닐 수 없다. 천리 밖에서 날아든 상소 한 장으로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 걷잡을 수 없는 논쟁과 시비의 싸움 속으로 빠져들었다. 날이 갈수록 일파만파로 번지며 강도와 열기를 더해 장장 9개월 간 찬반의 치열한 이슈가 되었다. 결국 박상은 남평 오림역으로,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연산군의 폭정시대를 마감한 중종반정은 신하가 임금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한 일대사건이었으나 공훈으로 조정을 차지한 공신집단은 사리사욕과 권력 독점에만 혈안이 되어 새로운 시대의 아젠다를 제시하지 못했다. 갑자·무오사화를 거치며 입지가 좁아진 신진사림에게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3,141자의 <신비복위소>는 조광조 등 신진사림에게 개혁정치의 활로를 제공했다. 또한 절의를 실천궁행한 일대 사건으로 엄혹한 시대의 언로를 열어주는 촉매제가 되었으며, 1519년 기묘사화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한 세상을 뒤흔들었던 '청복고비신씨소'의 신씨는 눌재가 목숨 걸고 상소한지 2백여년이 지난 뒤에야 단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이후 단경왕후라 불리게 된다.

이 소를 주도한 눌재 박상은 광주 서창동 절골 마을에서 증좌찬성 박지흥공과 어머니 계성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눌재는 3형제 중 둘째인데, 형은 하촌 박정이며, 아우는 육봉 박우다. 세 형제가 비범하고 문장 학행이 높았다. 이들은 중국 삼국시대의 마량 형제에 비유되기도 한다. 또 소식 동파와 아버지 소순, 아우 소철의 문장이 뛰어나 '부자삼소(父子三蘇)'라 칭송 받았는데, 눌재의 삼형제를 비견하여 '동국삼박', '박문삼주수(朴門三株樹)'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눌재는 형에게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에 급제, 조정에 나아갔다. 교서관 정자, 병조좌랑, 사간원 헌납,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으나 지나치게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해 훈구대신은 물론 심지어 임금까지도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급제 초반에만 내직에 있다가 주로 지방관으로 벼슬을 돌았다.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과 순천부사를 자원하였고 그 외에도 관료생활 대부분을 수령으로 보냈다. 여기 전하는 시 한수가 훈구대신들에게 둘러싸여 뜻을 펼치지 못한 채, 번민하고 괴로워했던 한 지식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숫 이무기는 왼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늙은 올빼미는 오른쪽에서 엿보네

쌍머리 뱀은 앞쪽에 도사리고 있고

구미호는 뒤에 쭈구리고 있네

네 가지 흉한 것들로 둘러쳐 있어

이내 몸 아득히 작고 초라하네

......

/고풍십운(古風十韻) 중에서

양심과 신념에 비추어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 일절 타협을 거부했던 눌재의 진면목이 그의 관직 생활 내내 절의와 의리로 나타난다. 전라도사로 나갔을 때,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정이 드러난 고양이와 얽힌 설화가 흥미롭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한 때로 팔도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녀를 구하는데 나주골에 김의(우부리)라는 관노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우부리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온갖 악행을 저질러 원성이 자자했다. 전라도사로 내려간 박상은 우부리를 나주 금성관으로 불러들여 연산군 총희의 아비라 하더라도 국법을 유린하였으니 법대로 엄하게 다스렸다. 천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우부리는 마침내 장살(杖殺)됐다. 연산이 대노하여 사약을 내렸고, 박상은 우부리의 죄상을 알리려 한양 길에 오른다. 장성 입암산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고양이가 나타나 바지 가랑이를 물고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박상은 큰 길에서 벗어나 고양이를 따라 산길로 끌려가는데, 그 잠시 비켜선 순간에 사약을 든 금부도사가 말 타고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박상은 길이 엇갈려 일단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열흘 후 때마침 중종반정이 일어나 화를 면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타난 고양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민간에서 수전되어 오는 것이 또한 설화의 맛이 아닐까 싶다.

눌재는 부임지에서는 민생 침해를 일삼는 토호 향리를 응징하고, 청렴한 처신은 물론 부세를 공평히 매기며 때를 가려 부역을 시키고, 소송을 공정하고 명쾌하게 처리하여 억울한 일이 없도록 힘썼다. 담양부사, 충주목사로 외직에 있을 때 두 번이나 청백리에 녹선됐다. 기묘사화 때에는 모친상으로 광주에 내려가 있어 사화에서 비켜나 직접 화를 당하지 않았지만 광주 남문 밖 10여리의 분수원에서 조광조를 맞이하고 이듬해 봄 용인 심곡리로 상여를 보내면서 시대의 불운을 한탄하기도 했다. 이후 충주목사로 5년간 장기 근무를 하였는데 이 기간이 그의 목민관 생활의 하이라이트였다. 조정의 정쟁에서 벗어나 정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 물러나 있던 김세필, 김안국, 이자 등과 김세필이 지비천 위에 지은 공자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였고, 적지않은 경비로 그들의 생활을 지원을 하였다.

눌재는 시문에도 뛰어나 1,200여 수의 방대한 시를 남겼고,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조계 정만종을 문하에 두었다. 눌재 박상하면 절조와 의리의 선비, 뛰어난 도학자, 기골있는 관료, 특히 백성을 위한 목민관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에 앞서, 실은 문장가로서의 눌재를 먼저 꼽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일세의 뛰어난 학자 임금이었던 정조도 눌재의 시를 "맑고 높으며 깨끗하고 기이하며 빼어나게 힘차며 아름답다"고 극찬하고 '우리 시인 중에 제일'이라고 치켜 세웠다. 분방한 시상, 무궁한 상상력, 해박한 어휘력 등 눌재의 시를 보면 생활이 곧 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김시습의 <매월당문집>간행 기초를 마련했고 <도정절문집>발간, 의리관이 주조로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를 간추린 <동국사략>를 편찬했다. 전문 문인이 아닌 관리로서 공무의 여가에 어떻게 1,200여 수에 달하는 시를 쓰고 12편의 부를 지었는지, 그 열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충주박씨 문간공파 박종률(16대손, 71)회장은 "문간공 눌재 할아버지는 절의와 시문학의 종장으로 대표됩니다. 그 분이 남기신 한시가 1,200여 수이며 부가 12편이 있습니다. 문중에서 순창 '삼인대 문화제'에도 참석하고 담양 가사문학관에 영정을 봉안하고 시 번역집을 내는 등 다양한 현창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향후 절골마을에 눌재 할아버지의 의리사상과 시문학 교육관을 설립하여 눌재 할아버지의 절의와 시문학에 대한 산실이 되었으면 합니다."고 했다.

중종 24년 여름에 나주목사를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온 눌재는 1530년 광주 방하동 자택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다. 향년 57세. 세상을 뒤흔들 문재와 심오한 학문과 의기를 겸비하고도 과도한 결벽이 당로자들과 맞지 않아 크게 쓰이지 못했으나 세상일은 반드시 바른데로 돌아가게 마련이고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덮은 뒤에라야 제대로 내려진다고 한다. 과연 눌재는 사후에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되어 영조 5년에 문간(文間)이라는 시호를 받고 영조20년(1744)에 강천사 앞에 삼인대비가 세워지고 정조 19년(1795) 겨울에 불천위에 명해졌다.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에는 눌재와 눌재의 조카로 최초 사림재상을 지낸 사암 박순의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고, 송호영당 아래 눌재의 15대 후손으로 현대 시문학(詩文學)의 동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가 있어 눌재의 시문학과 의로움에 대한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송호영당 편액

송호영당

순창 삼인대

순창 삼인대2

용아생가 2

용아생가

증이조판서 문간공 눌재 박상의 묘비

조선전기 문신이며 학자인 눌재 박상의 눌지집 목판각_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copy

문간공 눌재 박상 정부인 진양유씨 묘

문간공 눌재 박상 영정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영정이 보관된 송호영당

년순창 삼인대_영조20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3호 용아생가_ 매년 문화재활용 프로그램 및 용아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절골마을에 있는 문간공 눌재 박상.부인 진양유씨 묘소

광산구 소촌동 소재, 눌재 박상의 15손이며 시문학 동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 사랑채

광산구 소촌동 송호영당 전경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