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잠 자며 근무 '응급의료 개척자'... 추모 물결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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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쪽잠 자며 근무 '응급의료 개척자'... 추모 물결 이어져
해남출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 병원 집무실서 별세||설명절 의료공백 막기위해 초과근로... 과로사 추정||응급진료정보망 구축·닥터헬기·권역외상센터 도입
  • 입력 : 2019. 02.07(목) 19:47
  • 박수진 기자
7일 오후 응급의료서비스 체계에 앞장선 고 윤한덕 중앙응급센터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 빈소 안내문이 보이고 있다. 고 윤한덕 센터장은 응급의료 전용헬기(닥터헬기) 도입 등을 추진하며 응급의료서비스 체계 구축에 앞장 선 인물이다. 뉴시스
"20년 전과 비교해 우리나라의 응급환자 치료 체계가 좋아졌다고 느껴진다면, 국가와 국민은 한덕이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허탁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응급환자 전용 헬기(닥터헬기) 도입 등 국내 응급의료 분야를 6년간 진두지휘한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51)이 설 전날인 지난 4일 병원 집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설 명절 '응급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퇴근을 미루고 초과근로를 하다가 과로사한 것으로 국립중앙의료원은 보고 있다.

● '전남대 1호 응급의학과 전공의'… 닥터헬기·권역외상센터 도입

지난 1994년 전남대 의대 응급의학과 수련 생활을 함께 시작한 허탁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한덕이는 전공의 수련시절에 스마트하고 능력 있는 의사였다"며 "그는 평범하고 편안한 의사의 삶을 거부하고 동료의사의 삼분의 일밖에 안 되는 월급에도 몇 사람이 못하는 일을 했다. 한덕이의 삶에서 응급의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회상했다.

해남 출신인 윤 센터장은 광주제일고를 거쳐 전남대 의대 응급의학과가 생긴 1994년 '1호 전공의'로 자원해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하지만 응급환자가 간신히 구급차에 타도 엉뚱한 병원을 전전하거나 응급실에서 여러 진료과목의 협진을 받지 못하고 숨지는 현실을 본 뒤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의지를 늘 갖고 있었다.

허 교수는 "한덕이는 매일 밤낮 없이 환자를 돌봤다. 20여년 전 다른 의료분야 보다 열악한 응급실 문제에 대해 수없이 울분을 토로했다"며 "응급실에서 몇 명의 환자를 잘 치료하기보다 응급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는 선진국형의 체계로 개선해야 한다고 서로 공감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윤 센터장은 2002년 중앙응급의료센터 창립과 함께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2년 7월엔 센터장이 됐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응급진료 정보를 수집하는 체계인 국가응급진료정보망(NEDIS)을 구축했다. 이를 토대로 응급의료기관 체계 정립과 평가, 응급의료 전용 헬기 도입, 재난·응급의료상황실 운영, 응급의료종사자 교육·훈련 등 거의 모든 응급환자 진료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허 교수는 "한덕이는 2002년 중앙응급의료센터에 첫 발을 디딘 후 마치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처럼 살아왔다"며 "6년간 응급실에서 뼈저리게 느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개선안을 주도해서 추진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윤 센터장은 지난해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출석해 닥터헬기 착륙장이 부족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환자를 살리는 데 중대한 걸림돌이었지만 누구 하나 발 벗고 해결에 나서지 않던 문제들이었다.

허 교수는 "한덕이와 같이 한번이라도 일해 본 사람은 그가 꿈꾸는 미래를 알고 있을 것이다"며 "응급환자가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 그리고 적절한 의료진에 의해 응급치료를 받아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남대 의과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이용빈 더불어민주당 광주 광산갑 지역위원장도 "전남대 의과대학 시절을 함께 보냈는데, 늘 성실하고 응급 의료에 열정을 갖고 계셨다"면서 "지난 세월호 참사 때 팽목항으로 의료 파견을 갔었는데, 총괄책임을 맡아 함께 의료진으로 지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며 갑작스런 죽음에 애통해했다.

●"누적된 과로로 인한 사망" 판단…10일 국립중앙의료원장(葬)

윤 센터장은 지난 4일 오후 6시경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행정동 2층 중앙응급의료센터장실에서 발견됐다.

검안의는 '급성 심정지'(심장마비)라는 1차 검안 소견을 내놓았다. 발견 당시 윤 센터장은 책상 앞에 앉은 자세로 있었다. 전문가들은 발견 당시 정황으로 미뤄 어지럽거나 가슴이 답답한 급성 심근경색의 전조 증상도 없이 빠르게 의식을 잃었다고 보고 있다.

정확한 사인(死因)은 유족의 뜻에 따라 부검으로 밝힐 예정이지만, 의료원 측은 누적된 과로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하고 있다. 중앙응급의료센터는 국내 응급의료 인력과 시설을 총괄하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으로, 특히 명절에 업무가 과도하게 늘어나는 곳이다. 대형 교통사고로 환자가 한곳에 몰려 의료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전국 응급실 532곳과 권역외상센터 13곳의 병상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 직원들이 윤 센터장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 1일 오후 8시경 동료 의사와 저녁을 함께 먹고 각자 업무 위치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윤 센터장이 가족과 함께 설에 귀성하기로 해놓고 주말 내내 연락이 닿지 않자 그의 아내는 4일 직접 병원 집무실을 찾았다가 직원들과 함께 숨진 그를 발견했다. 윤 센터장은 슬하에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자녀가 1명씩 있다.

조문은 국립중앙의료원(02-2262-4822)에서 7일 오전 11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9시 국립중앙의료원장(葬)으로 치른다.

박수진 기자 sujin.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