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4일 열린 A고교 축제에서 제시된 ‘나락퀴즈쇼’ 질문과 답변 문항들. SNS 갈무리 |
최근 20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대형 유튜브 채널이 선보인 ‘나락퀴즈쇼’라는 콘텐츠가 SNS와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콘텐츠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거나, 답변자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선택 항목을 제시해 답변을 곤란하게 만듦으로써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는 형식의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답변자를 외통수에 몰아넣어 어떤 대답을 하든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옥을 일컫는 ‘나락’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각종 기관과 단체들도 해당 콘텐츠를 패러디한 홍보 영상 등을 제작해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하면서 더욱 큰 화제를 모았다.
최근 연말연시를 맞아 열린 전국의 여러 학교 축제에서도 ‘나락퀴즈쇼’가 진행됐고, 일부 학교의 퀴즈쇼에서 부적절한 질문과 선택 항목을 다룬 사실이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며 누리꾼들의 비판이 지속되고 있다.
한 예시로 경북의 한 중학교 축제에서는 해당 학교의 슬로건을 고르라는 질문에서 ‘딥페이크(허위영상물) 전문가’ 등의 선택 항목를 포함해 성 관련 범죄를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모습을 보여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광주지역의 A여중과 B고교도 학교 축제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퀴즈쇼를 진행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A여중은 지난 7일 열린 학교 축제에서 ‘나락퀴즈쇼’를 진행했으며, 이날 퀴즈쇼의 질문 중 하나로 ‘가장 싫어하는 운동을 고르시오’라는 문항을 포함했다. 선택 항목으로는 3·1운동, 흑인인권운동, 노동자 인권운동, 여성운동 등이 제시됐다.
앞서 B고교 역시 지난해 12월24일 진행된 학교 축제에서 비슷한 질문을 던졌고, 선택 항목에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5·18민주화운동, 여성운동 등을 포함했다.
이 같이 역사·사회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내용의 ‘놀이’를 통해 특정 성별·계층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거나, 중차대한 범죄행위를 희화화함으로써 성장기 아동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저해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광주시교육청에는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제공하는 ‘한눈에 보는 민원 빅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한달 동안 광주시교육청에 접수된 민원은 총 178건이었지만, 올해 1월에는 12일 오전 기준으로 이미 290건에 달하는 등 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키워드 분석 결과, 민원에는 ‘감수성 교육’, ‘역사 인식’, ‘재발 방지’ 등의 단어가 주로 담긴 것으로 나타났다.
왼쪽부터 광주 A여자중학교와 B고등학교가 학교 누리집에 게재한 사과문. 학교 누리집 갈무리 |
A여중은 사과문을 통해 “해당 프로그램 준비에 있어 학생들이 비공개를 요구해 학교 차원의 철저한 검토와 지도가 부족했다”며 “앞으로 학교 행사 진행에 앞서 면밀히 검토·지도하고 각종 계기교육을 철저히 해 학생들의 민주시민 의식을 함양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B고교 역시 “앞으로 모든 교육활동 진행에 있어 학생들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사죄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사회적 성찰이 필요한 역사적·인문학적 소재를 가벼운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것은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를위한시민모임 상임활동가는 “역사적 소재를 희화화하는 행위는 사회적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기에 학생들이 행사를 준비하며 더 깊이 고민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한 점이 안타깝게 느껴진다”며 “사회적 성찰을 요구하는 인문학적 소재는 가벼운 웃음거리로 소비될 대상이 아니다. 이를 객관식 문제처럼 다루는 접근은 그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준명 기자 junmyung.yoon@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