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54>시대의 그늘, 이후 예술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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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54>시대의 그늘, 이후 예술의 순간들…
●이선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
  • 입력 : 2024. 06.16(일) 17:48
임남진 작 연서(戀書), 100x100cm, 한지에 채색, 2024년.
 우리가 시대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 신문, 미디어들을 통해 시대와 사회의 문제들을 읽고 느낀다.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사실적으로 과거 역사적 사건들로 재현할 것인가에서 벗어나 어떻게 현재로 기억할 것인가로 이어지는 미술의 움직임들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언제나 숙제로 남아있다. 필자가 광주에서 5~6월 기획 전시회를 준비하고 기획하며 보낸 지도 몇 해가 흐르고, 매년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과거의 시대적 역사를 듣고, 배워온 나에게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작가들의 작품은 나에게 과거를, 광주를 또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하는 공부이자 통로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시대적, 사회적 반발에서 시작된 작업들이 서서히 내면으로 자신의 이야기로 스며들어 빛을 발할 때, 우리는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생각이나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묘사에 능통한 재능을 가진 이들은 그 기술을 빌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무엇으로든 전달할 수 있고, 그 전달력은 오랜 세월 동안 대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그 전달력은 때로는 유형적 메시지를 담은 창작자의 예술 작품으로 우리 곁에 오랫동안 힘을 발휘하며 머물러 그 시절 예술가의 생각과 시선을 은유적으로 전해주기도 하는 매력을 내포한다.

임남진 작 연서(戀書) 연작들, 한지에 채색, 2024년.
 임남진 작가는 오랜 시간 지역 민중미술 단체에서 활동하다 2019년 탈퇴했고, 기존의 민중 미술적 성향의 구조와 작업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작가의 주변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와 시대적 문제들을 사소한 일상과 주변의 인물들을 그리며 동시대의 풍경을 그려왔다. 현재 오십 대의 작가는 지난 오월 광주의 핏빛이 채 아물지 않은 시기 대학을 다니며 혼란스러운 청년 시절을 보냈다. 광주에서 태어난 여성이자, 작가로 성장하며 녹록하지 않았던 관념적 지역과 사회 분위기에서도 주변의 함께했던 동료들과 이념을 독자적인 동양화 방식의 그림으로 회화적으로 기록하고 그려왔다. 꾸준히 전업 작가로 작업했고, 국내외 다양한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외면에 머물던 작가적인 시선은 다시 자신 스스로의 삶의 근원이자 내적 심상으로 향하게 되었다.

 최근,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풍경으로도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가면서 외형의 ‘재현’이 아닌, 심상의 ‘재현’을 추구하며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왔던 근원적 이미지들, 감정에 남아있던 존재했지만 아직 꺼내놓지 않은 내면의 수줍은 연서(戀書)형태로 조금씩 들추며 살아가는 시대의 풍경을, 자신의 세대가 증명하는 은유적인 풍경으로 구현하고 있다. 최근 빠르게 변모하는 현시대 속에서 광주 그리고 한국민중미술의 방향과 범주가 다양한 관점으로 임남진의 독자적 작업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

표인부 작 소외된 풍경, 장지위에 아크릴 칼라+먹, 45.5x53cm, 2011년.
 표인부 작가는 자신의 일상에서 크고 작게 느껴졌던 감정과 기억, 매 순간순간마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인식되지 않는 현실의 상황이나 자연의 현상을 통해서 기억들은 회상한다. 처음에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상의 기억들이 반복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쪼개지고 지워지면서 상징적인 잔상으로 남은 기억들을 각기 다른 하나의 색채로 인식해서 표현하고 있다. 화면 위의 무너진 형상의 색채는 ‘자연의 바람’처럼 일어나는 기억들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의 의식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사적인 기억들의 형태가 자연의 바람과 유사성을 떠올리며 어릴 적 아버지의 죽음과 슬픔, 유년 시절의 우울함과 서러움, 십 대 시절의 좌절의 모습, 청년 시절의 분노와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모습, 낯선 나라에서 희망을 꿈꾸던 모습…차갑고 건조한 바람…등의 다양한 표현 기법에서는 종이가 가지고 있는 유연함과 가변성 등의 물성을 활용해서, 화면 위에 수천수만 장의 염색한 작은 한지 조각들을 한 장 한 장 반복적으로 찢거나, 세워서 노동으로 캔버스에 붙인다. 그것은 작가 스스로가 나아갈 과 자연 바람의 방향성과 운동감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전업 작가로 다양한 재료를 다룬 작가이다. 최근 시대적인 사건(세월호사건, 이태원참사 등)을 목격한 작가의 시선을 서서히 작업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기억은 바래고 닳아져 새로운 형상이 색으로 남겨졌다. 기억을 하나의 일화로 다루기보다는 기억, 그 자체에 주목하고 ‘바람’이란 상징과 연결한다. 그리하여 기억은 다층적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작가는 한지에 직접 색을 물들이는데, 그 색은 그 참사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봄날의 색이고, 바다의 색이다. 그리하여 그 색 한지 조각들이 모여 이루는 움직임은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이자 영혼의 흔적이 된다.

표인부 작 ‘바람의 기억’을 감상할 수 있는 ‘서정적 순간, 그 이후…’ 전시장 전경.
 박수만 작가는 ‘잃어버린 순수’를 작업의 모티브로 일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대적 풍경을 독자적인 해학으로 담아낸다. 어쩌면 대상의 가장 깊은 내면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겉모습은 벗겨진 단순한 원형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인물들은 서구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간과해 온 시대적 길목에서 진정한 생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나 또는 우리의 사람들인 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광주대인시장 프로젝트를 통해서 대중 및 상인들과 예술의 장르와 범주를 실험하고, 지역적 회화성을 넘어 활발한 국내외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회화적 메시지를 정립한 광주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인물들은 자신의 실존을 은폐하고 가리는 사회적 기제의 부재에 의해 노출된 상태이며, 또한 그것은 나아가 사회적 차원의 부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들은 모두 실존이라는 공통의 근거를 통해 결핍과 부재, 부적절함으로 인해 표현은 훨씬 더 흥미로운 현대인의 해학적 풍자로 드러난다. 작가는 독특한 신체의 변형과 색상을 작품 속 인물들에 부여했고, 우리는 ‘특이할 것이라곤 없는’ 일상적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어쩌면 그 모습은 곧 나(너, 우리) 자신이자, 인간의 형상과 작가가 하고자 하는 대화적 낙서 같은 기록들에 시선을 멈추고 ‘정확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박수만 작 ‘요가’ 외 ‘내면’,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서정적 순간, 그 이후…’ 전시장 전경.
 우리에게 어쩌면 예술의 정형화된 틀을 깨고, 보편적 진리에 경계를 허무는 것 너머의 자신의 삶 속 마주했던 아주 평범한 ‘보통의 깨달음’ 들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경험하게 되는 일시적이거나 지속적 깨어남을 자신의 세계와 언어로 담아내고자 함은 아닐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시대의 예술가로 살아감에 있어 ‘깨어남’을 전달한다는 것. 자신의 속도로 삶과 작업을 이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의식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 안에 머물렀던 현대 미술이 글이나 말로 풀이되었던 지식의 배경이나 설명들에서 잠시 벗어나 작가들의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경험들, 그로 인해 남겨진 기억과 감각들, 은유적 시선을 통해 구현된 새로운 시도의 작품들을 통해 시대의 역사와 맞물린 현재의 예술적 의미가 전해지는 전시회로 관람객들에게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