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앞으로 진군하던 민주화 정신 이어나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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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도청 앞으로 진군하던 민주화 정신 이어나갈 것”
5·18 당시 차량 시위 이행기씨
계엄군 폭력·만행에 투쟁 참여
무등경기장~금남로 택시 행진
“진실 밝혀질 때까지 연대해야”
  • 입력 : 2024. 05.20(월) 18:49
  • 정상아 기자 sanga.jeong@jnilbo.com
1980년 5월 당시 동료 택시 운전사들과 함께 차량 투쟁에 참여한 이행기씨가 20일 열린 ‘민주기사의 날’ 기념 행사에서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상아 기자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두려움이 앞섰지만 동료 택시 운전사들과 함께 ‘도청 탈환’을 외치며 차를 몰았다.”

1980년 5월 당시 6년 차 택시기사였던 이행기(70)씨는 44년이 지난 이날 운수노동자 차량 투쟁의 시작이었던 광주 북구 임동 무등경기장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29살에 5·18민주화운동을 겪은 이씨는 여느 때와 같이 택시에 손님을 태우고 광주 곳곳을 누볐다. 행선지로 이동하던 이씨의 눈앞에는 시위를 하던 학생들과 계엄군의 대치 상황이 보였다.

이씨는 “처음엔 계엄군이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연행하고 해단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젊은이고 노인이고 막무가내로 잡아 폭력을 행사했다”며 “시민들이 아무 이유 없이 계엄군의 만행에 당하고 있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씨를 비롯한 다른 택시기사들은 광주를 돌아다니며 계엄군의 폭력을 지켜봤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에 대항하기 위해 택시기사들은 5월20일 무등경기장 앞 도로에 모였다. 당시 계엄군의 도로 통제로 고속버스가 중흥동 고속버스터미널로 진입하지 못하자 무등경기장 앞은 임시 정류장으로 이용됐고, 승객을 태우기 위한 택시들이 줄을 지었다고 이씨는 설명했다.

이곳에 모인 택시기사들은 200여대의 택시를 몰고 ‘도청 탈환’과 ‘시민 보호’를 목적으로 무등경기장에서 출발해 도청으로 향했다. 택시기사들은 광주시민들을 구출하고 도청을 탈환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이씨는 “지금 택시는 안전하게 나오지만 당시 택시는 작고 열악했다”며 “택시를 몰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광주의 심각한 상황에 위험하다는 걸 알고도 ‘도청 탈환’을 외치며 나섰다”고 말했다.

당시 계엄군이 통행을 막고자 전남대 사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했음에도 광주 길을 잘 알던 택시기사들은 우회해 도청으로 진군했다. 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에 들어서자 시내버스와 일부 차량, 시민들이 앞선 택시 행렬에 따라 투쟁했다.

20일 오후 광주 북구 무등경기장 앞에서 참석자들이 차량 행진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정상아 기자
죽음을 불사하고 나선 택시기사들의 차량 투쟁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에 위축됐던 광주 항쟁의 촉발제가 됐다.

이들의 항쟁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7년부터 매년 차량 시위 재현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날도 5·18민주화운동 당시 택시로 시위대를 이끌었던 차량 시위를 기리기 위한 ‘민주기사의 날’ 행사가 광주 옛 무등경기장과 금남로 일대에서 열렸다. 행사에는 80년 5월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택시기사 11명과 전국 각지에서 모인 택시기사들 300여명이 함께했다.

옛 무등경기장 앞 도로에서 모인 이들은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포니 택시’ 2대를 앞세운 택시와 일반 승용차 70여대가 참여했다. 본인의 택시 옆에 자리를 잡은 기사들은 주먹을 굳게 쥔 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기념식을 마친 이들은 유동사거리를 지나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까지 4.5㎞ 구간을 행진했다.

차량 보닛에 ‘비정규직 철폐’, ‘오월정신 계승’, ‘택시제도 개혁’ 문구와 태극기를 부착한 채 44년 전 5월 광주 차량 시위를 재현했다.

행사를 주관한 민주택시노조 광주본부 관계자는 “차량 시위는 노동자가 5월 항쟁에 조직적으로 나온 첫 투쟁이다”며 “계엄군에게 계속 밀리던 시민들에게 힘을 싣는 촉발제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미경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장은 “지난 1980년 5월 여러분과 선배들의 정의로운 판단과 행동이 광주시민에게 저항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며 “앞으로도 정의로운 판단이 필요한 시기 맨 앞에 서서 44년 전 그날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민주기사의 날 행사는 공법단체 내홍 등으로 행사가 불발될 위기에 놓였으나 민주택시연합의 항의를 통해 처음으로 시민사회인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가 행사 주최를 맡아 개최됐다.
정상아 기자 sanga.je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