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가 낳은 ‘중국의 별’ 발자취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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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광주가 낳은 ‘중국의 별’ 발자취를 돌아보다
● 정율성 선생 유적 탐방 가보니
항일운동가이자 중국 3대음악가
양림·화순 능주서 어린 시절 보내
생가·흉상 등 지역 곳곳 흔적 여전
“의열단 등 항일운동에 주목해야”
  • 입력 : 2023. 07.24(월) 18:00
  • 화순=김선종·강주비 기자
24일 ‘정율성 선생 광주·전남 인연 유적지 탐방’에 참여한 광주동일미래과학고 학생 20여명과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이 광주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를 돌아보고 있다. 화순=김선종 기자
“정율성은 중국인에게는 혁명음악가로 남았지만, 그가 중국에 갔던 이유는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꼭 기억하세요.”

24일 광주 남구 양림동에 낯설고도 특별한 이름이 크게 울려 퍼졌다. 중국 3대 음악가로 불리는 ‘정율성’, 그가 주인공이다. 20여명의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림동 길 한복판에 우뚝 세워진 정율성 선생의 흉상을 오랜 시간 눈에 담았다.

이날 광주 동일미래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은 지역 곳곳에 남은 광주 출신 항일운동가이자 음악가인 정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24일 ‘정율성 선생 광주·전남 인연 유적지 탐방’에 참여한 광주동일미래과학고 학생 20여명과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이 광주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를 돌아보고 있다. 화순=김선종 기자
정 선생은 광주와 화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33년 항일 운동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 100대 국민가요로 꼽히는 ‘연안송’, 인민해방군가로 지정된 ‘팔로군 행진곡’ 등을 작곡해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서 정 선생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광주 출신이라는 점도 알려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동일미래과학고 학생들은 후손으로서 그의 예술혼을 기리고, 일본에 처절히 맞서 싸웠던 절개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광주 정율성 거리, 화순 정율성 생가 등을 탐방했다.

이들이 처음으로 찾은 곳은 화순 능주면의 생가. 황토색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그의 대표곡인 ‘연안송’이 나지막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음악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마루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웅장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 듣기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 앞에서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정 선생의 일생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24일 ‘정율성 선생 광주·전남 인연 유적지 탐방’에 참여한 광주동일미래과학고 학생 20여명과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이 광주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를 돌아보고 있다. 화순=김선종 기자
노 원장은 “정 선생은 4살부터 8살까지 화순 능주에 머물렀고, 광주로 다시 이사와 숭일학교를 졸업했다. 이후에는 의열단이던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운동 및 음악 활동을 했다”며 “지금 들리는 ‘연안송’은 연안이 어딘지도 몰랐던 당시 중국인에게 연안에 중국 공산당 혁명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사회주의 이념을 가졌던 젊은이들이 연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던 역사적인 음악이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이어 정 선생의 짧은 학창 시절 흔적이 남아있는 능주초등학교를 방문했다. 능주초는 ‘정율성 교실’을 비롯해 흉상과 벽화 등을 조성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1920년대 당시 교실 풍경이 그대로 재현된 정율성 교실에는 그의 생활기록부뿐만 아니라 정 선생의 재학 당시 사진 등 관련 자료가 함께 전시돼 있었다.

이은서양은 “광주 출신임에도 불구, 정 선생에 대해 오늘 처음 알게 됐는데 실제 그분이 다녔던 학교에 이렇게 발을 들이니 역사의 현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며 “정율성 선생이 작곡한 노래를 더 찾아보고 싶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24일 ‘정율성 선생 광주·전남 인연 유적지 탐방’에 참여한 광주동일미래과학고 학생 20여명과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이 광주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를 돌아보고 있다. 화순=김선종 기자
정 선생의 발자취는 광주에도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고향인 광주 남구 양림동 일대에는 정 선생의 이름을 딴 도로명 ‘정율성로’를 중심으로 흉상 및 거리 전시관 등이 조성돼 있었다.

한 손에 깃펜을 들고 장엄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흉상에서 시작해 230m가량에 이르는 정율성로에는 연안송 악보와 연주음악을 비롯 ‘1940년대 말 평양국악대 지위’, ‘1943년 태항산 군정학교 시절’ 등 정율성의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노 원장은 “중국으로 건너간 정율성은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매주 상하이로 건너가 성악을 배우는 등 음악 공부에 전념했다”며 “그는 1937년 매형 박건웅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 해방동맹의 특사 자격으로 시안의 팔로군 판사처를 거쳐 연안에 들어갔으며, 섬북공학·루쉰예술학교를 다니며 ‘연안송’을 작곡했다”고 말했다.

24일 ‘정율성 선생 광주·전남 인연 유적지 탐방’에 참여한 광주동일미래과학고 학생 20여명과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이 광주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를 돌아보고 있다. 화순=김선종 기자
거리 끝자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양림동 79번지 주택은 그의 또 다른 생가다.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담 너머로 정 선생이 어린시절 올라가서 놀았던 나무를 볼 수 있다.

학생들은 이날 탐방을 통해 지역의 역사를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류이지양은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책에서만 보던 정 선생의 유적이 우리 지역에도 남아있는 줄 몰랐다”며 “이번 탐방을 계기로 앞으로 양림동 거리를 지날 때 정 선생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그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편, ‘정율성 선생 광주·전남 인연 유적지 탐방’ 행사는 전남일보가 주최하고 광주 남구와 동일미래과학고가 후원했다.

24일 ‘정율성 선생 광주·전남 인연 유적지 탐방’에 참여한 광주동일미래과학고 학생 20여명과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이 화순 능주면 능주초등학교에 조성된 ‘정율성 교실’을 돌아보고 있다. 화순=김선종 기자
화순=김선종·강주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