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생명이라는 이름의 쪽배를 타고 윤슬을 가르는 순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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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생명이라는 이름의 쪽배를 타고 윤슬을 가르는 순교 여행
348. 풍경(風景)의 빛과 그늘
“흰 종이라면 어떤 것이든 주워오셔 글자든 그림이든 아무것이라도 쓰라시던 아버지가 내 글쓰기의 근원이라는 점이다. 일자무식 나의 아버지는 나를 통해 세상의 무엇을 글자로 쓰고 싶어 하셨을까? ”
  • 입력 : 2023. 06.01(목) 14:48
김지하, 묵란-역여, 2008년 종에에 먹-김지하 1주기 추모서화전에서
김지하, 묵란-하로동선, 1984년, 종이에 먹, 김지하1주기 추모서화전에서
내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구상한 제목이 만경보(萬景譜)이다. 문자 그대로 만 가지의 경치를 노래하겠다는 뜻이다. 고은의 <만인보(萬人譜)>에 기댄 작명이긴 하나 그와는 결이 다르다. 김지하가 초기에 ‘이야기 시’를 써서 담시(譚詩)라 이름 붙였던 바를 상고한다. 고은이 1986년부터 2010년까지 다룬 인물이 5,600여 명에 이른다던가. 30권 4,000편이 넘는다고 하던가.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올랐던 방대한 작업이니 어찌 구닥다리 시집 한 권 내고 그에 비길 수 있으랴. 다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표방처럼 시가 갖는 선한 의지를 우리 공생체와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무던히 앞서 저 홀로 달음박질쳤음을 고백해둔다. 들판의 농부에게 농사가 근본이듯, 내 농사의 근본이 여기 있음을 분명히 하고 그에 충실할 뿐이다. 졸저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다할시선 08)>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였다면 지금 준비하는 두 번째 시집은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다. 평생 자식을 못 낳아보셨던 내 첫째 어머님에 대한 연가(戀歌)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교 글짓기대회에서 사실상 우승했던 적이 있다.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내게는 세분의 어머니가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만 또렷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동안 찐감자(고구마) 등을 들고 선생님 사택에 가서 잠을 자던 시절이었다. 사부일체(師父一體) 혹은 사모일체(師母一體), 내게는 부모님과 같은 선생님이셨다. 관련한 이야기들을 나중에 풀어 쓸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와 함께 사는 고학년 한 누나의 수기가 너무 절절하였던지 선생님이 양해를 구하셨다. 네가 일등이긴 하지만 누나에게 일등을 양보하자고 말이다. 내 유년의 글솜씨를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풍경을 풀어쓰기 위해 내놓는 말이다. 여러 차례 밝혔지만 학교 들어가기 이전부터 아버지는 학생이 나 하나뿐인 서당에 쌀섬께나 져다 주시고 글쓰기를 강요하셨다. 내가 어린 나이에 뗀 천자문은 시나브로 사라져버렸어도, 일자무식의 한을 내게 상속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은 내 삶 전반을 관통해왔다. 내 첫 시집의 첫 번째 시가 ‘아무 글자든 쓰거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겹겹이 살아 오르는 낱말 하나하나를 들어 아버지를 보태고 어머니를 덧입히는 풍경을 말하기 위해 중언부언함을 용서 바란다. 그러함에도 덧붙이고 싶은 말은, 흰 종이라면 어떤 것이든 주워오셔 글자든 그림이든 아무것이라도 쓰라시던 아버지가 내 글쓰기의 근원이라는 점이다. 일자무식 나의 아버지는 나를 통해 세상의 무엇을 글자로 쓰고 싶어 하셨을까?



풍경의 경(景)은 ‘해빛’과 ‘해그늘’을 포함한다.



내가 장차 <만경보>를 써나간다는 점을 좌계 김영래 선생에게 보고드리고, 풍경의 경(景)에 대해 톺아 본 바를 여쭈었더니 놀라운 답변을 보내오셨다. “좌계는 이윤선 시인이 발견한 ‘경(景)’이란 글자에 ‘해 빛’, ‘해 그늘’이 함께 있다는 말씀에 아!! 드디어 메터-버스(meta-(uni)verse)의 세계를 찾아내셨구나!! 하고 감격합니다.” 풍수(風水)나 경치(景致)의 풍경(風景)을 남도의 일상 언어로 포착하고자 했던 내 시선을 과찬하신 게다. 참고로 경치를 말하는 경(景)은 볕이라는 뜻(경)과 그림자라는 뜻(영)이 같이 들어 있다. 좌계는 이렇게 풀이했다. “그림자 ‘영(物之陰影)’의 용례로는 시경(詩經)의 ‘범범기경(泛泛其景)’을 들 수 있겠습니다. 생각건대, 배(舟)가 지나갈 때, 물결이 일고, 이때의 물결이 한쪽은 ‘밝고’, 반대쪽은 그늘이 져서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을 뜻한 듯합니다. 범범기경(泛泛其景)에서 경(景)의 자의(字意)가 드러나도록 해석하면, ‘해 빛과 해 그늘 서린 물결 내며 떠가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좌계는 쪽배가 지나가는 물결의 양 갈래에 주목하였다. 나는 물결의 양 갈래보다는 보이는 물결과 보이지 않는 물골에 주목하는 편이다. 내 이론 중 물골론이 그것이다. 좌계의 설명을 이어 소개한다. “이 범범기경(泛泛其景)이 나오는 시경(詩經)은 국풍(國風) 패풍(邶風) 이자승주(二子乘舟)입니다. 이 시는 고사성어 급수동사(伋壽同死)의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 급(伋)과 수(壽)는 이복형제로서 미모의 부인들과 2대(代)에 걸친 사건이며, 배를 탄 두 이복형제가 결국 죽게 되는 기막힌 사건입니다. 태자인 급(伋)이 ‘도망치려고 할 때’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불가하다. 아버지의 명을 버리면 어찌 자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천하에 아비 없는 나라가 있다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옳다.’ 말하자면, 급(伋)과 수(壽)는 ‘아비 없는 나라’를 향해 ‘죽음의 강’에 배를 띄운 것이고, 이는 순교(殉敎) 여행입니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는 세상에서 ‘아비’가 ‘아들’을 죽이지 않는 세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비 없는 나라’를 향해 두 이복형제가 배를 타고 나가는 순교(殉敎) 여행인 것입니다.” 내가 주목한 풍경의 시선에 시경의 노래를 얹은 겹의 눈매라 아니할 수 없다. 종국에 이를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쪽배에 오르는 급수(伋壽) 형제를 생각한다. 이것은 김지하가 평생에 걸쳐 추적한 화두 ‘흰그늘’에 가닿는다. 왜 그러한지는 이전 칼럼에 몇 번 얘기했고 또 싸목싸목 밝혀나갈 예정이다. <사기> 등에 나온 원전의 고사가 부자지간의 애첩 관련이어서 민망하기는 하지만, 다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시경>에 부언된 패(邶)나라 사람들의 노래와 행간이다. 아비를 거역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떠난 두 아들의 순교 여행, 그들의 배가 가르고 지났던 흰 물결 그리고 물결의 그림자 말이다. 김지하의 생애를 에둘러 그가 탔던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상고하니 ‘해빛’에 닿고 ‘해그늘’에 닿으며 ‘흰그늘’에 닿는다. 좌계가 내게 보낸 답변에 그 일단이 있다. “이자승주(二子乘舟)하니 범범기경(泛泛其景)이로다! :두 아들만 쪽배에 타니, 해 빛과 해 그늘 서린 물결 내며 떠가네!! /원언사자(願言思子)라 중심양양(中心養養)호라! :두 아들 생각하는 말을 하라시면, 기둥 마음 근심에 출렁거려 첩첩이네! /이자승주(二子乘舟)하니 범범기서(泛泛其逝)로다! :두 아들만 쪽배에 타니 저승길로만 떠나가네!/ 원언사자(願言思子)라 불하유해(不瑕有害)아! :두 아들 생각하는 말을 하라시면 해(害) 있음이 어찌 아니리오?”



남도인문학 팁

급수(伋壽) 형제의 순교 물길과 김지하의 쪽배

풍수와 풍경의 경(景)에 스민 ‘해빛’과 ‘해그늘’은 김지하의 ‘흰그늘’에 가닿는다. ‘해빛’, ‘해그늘’, ‘흰그늘’을 나는 한 단어로 개념 짓고 붙여 쓴다. 내가 기획한 <만경보>의 풍경도 <사기>의 고사에 닿고 시경의 ‘급수동사(伋壽同死)’에 닿으며 김지하의 ‘흰그늘’에 가닿는다. 좌계의 풀이를 받고 나니 이 생각이 더 명료해졌으므로 글로 남겨둔다. 2022년 8월 19일자 본 지면을 통해 김지하가 인용했던 『삼국유사』 「고구려조」 주몽 탄생 기사를 소개했다. “해모수와 사통한 뒤 버림받은 유화를 이상하게 여긴 동부여의 왕 금와가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햇빛(日光)이 비추니 몸을 이끌어 이를 피하고 해그늘(日影)이 좇아와 비추니 받아들여 이로 인해 잉태했고 하나의 알을 낳았다.” 요약해 말한다. 김지하의 개인사적 서사, 예컨대 초기 시 ‘용당리에서’ 등에서 나타나는 흰 손으로 흰그늘 담론이 착상(着床)되었고 이것이 민요와 판소리의 ‘그늘론’, ‘율려론’ 등으로 개진되어 주몽설화 등의 보편적 서사의 틀로 완성되었다. 급수동사의 고사에 견주어 보고 남도 씻김굿 길닦음의 내력을 보태니 생명이라는 이름의 쪽배를 타고 흰 거품과 물그림자의 윤슬 가르며 순교 여행을 감행했던 김지하가 보인다. 아, 거듭 상고해보니 우리 아버지가 내게 이르셨던 명령을 김지하가 벌써 실천했던 것 아닌가! 그러하니 ‘흰그늘’이 한국 미학의 정언(定言)임을 어찌 거듭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