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이슈 93-1> 흔적 사라진 ‘여순사건 유적지’… 제주4·3 본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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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이슈 93-1> 흔적 사라진 ‘여순사건 유적지’… 제주4·3 본받아야
구례군 간전면 피해지역 가보니
논으로 개간… 위령비 조차 없어
간문천·산동면 꽃쟁이골 등 방치
4·3, 기념사업·연구 활발 대조적
“유적 정비 등 제도적 지원 필요”
  • 입력 : 2023. 04.02(일) 16:05
  • 김은지 기자 eunji.kim@jnilbo.com
구례군 간전면 일대. 여순사건이 발발했던 1948년 당시 주민 300여명을 생매장했다는 증언이 나온 간문천변이 현재 논으로 개간된 모습이다.
“그 담벼락에 사람을 줄줄이 세워놓고 총을 쏴댔는데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유족들은 다 어딘지 알어. 눈에 선해서….”

지난달 31일 찾은 구례군 간전면. 맑게 갠 파란 하늘과 봄을 맞아 우거진 녹음이 조화롭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지만 불과 75년 전 이곳은 핏빛 비명으로 가득했다.

1948년 10월19일, 제주 4·3 진압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국군 14연대는 진압군을 피해 대부분 지리산 지역으로 입산했다. 한번 숨으면 자취를 찾기 어려운 험한 산세에 의지해 게릴라 작전을 펼쳤고 진압군은 산악지대를 추적하며 토벌에 나섰다.

한순간에 반군들의 식량 보급처가 된 구례 산자락 마을 주민들은 진압군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압군은 토벌 작전을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내쫓는 이른바 ‘소개 작전’을 벌였고 반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들면 총부리를 겨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추정에 따르면 1948년 10월 말~1949년 7월까지 구례군에서만 14곳의 학살터에서 8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규종 여순10·19항쟁 전국유족총연합 회장은 “사건 당시 피로 물들었던 담벼락은 이제 너무 낡았고 수백명을 생매장한 천변은 논으로 개간돼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며 “그러니 누가 이곳을 사람 죽이고 묻었던 곳이라고 알겠나. 유족들이나 알지”라고 하소연했다.

간문초등학교 담벼락 등 여순사건 역사유적지는 전남 전역 곳곳에 분산돼 있다.

전남도에 따르면 가장 피해가 컸던 여수시, 순천시 등 6개 시·군에 42개소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민간인 집단 희생터 23개소를 비롯해 격전지, 주둔지와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묘지, 위령탑, 위령비 등으로 다양했다.

전남도는 지난해 파악한 여순사건 역사유적에 대해 명칭, 위치, 보존상태와 여순사건과 관계 등 현장 확인을 거쳐 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라며 안내판 설치, 주변 정비, 시설물 보수 등 유적 정비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구례군 내 가장 큰 피해 지역으로 꼽히는 간전면 간문천, 산동면 꽃쟁이골, 토지면 피아골에서도 여순사건 역사유적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주 4·3항쟁 75주년이다.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아직 온전한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제주 4·3항쟁과 여수·순천 사건 희생자까지 하루빨리 명예회복이 이뤄지길 바란다. 제주 4·3평화공원에 제주, 호남, 등지에서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 불명인을 위로하기 위한 비석 4000여기가 세워져 있다. 김양배 기자

여순사건과 쌍둥이 사건이라 불리는 4·3사건이 벌어진 제주의 경우 사건 관련 유적지 정비는 물론, 다크투어리즘까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대조를 보이고 있다.

제주시는 지난 2020년 5월 ‘제주특별자치도 다크 투어리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전국 최초로 제정해 시행 중이다. 뿐만 아니라 75주기를 맞아 제주4·3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 상황이다.

여순사건위원회 관계자는 “여순사건의 경우 제주4·3과 같은 해에 벌어진 일이지만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에 대한 사업은 40년이 뒤처져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당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진상규명 작업을 달성하고 나면 사건에 대한 인지도, 인식 개선 사업이 진행된다. 여순사건 역시 제주와 마찬가지로 지속가능한 역사유적 정비는 물론 다크투어리즘 프로그램 연구·개발, 교육문화사업 운영 등 제도적 지원장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은지 기자 eunji.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