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에세이·오소후> 미인의 손길 따라 속절없이 지나는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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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세이·오소후> 미인의 손길 따라 속절없이 지나는 봄날
오소후 시인·한국예술문화명인
  • 입력 : 2023. 03.23(목) 13:52
오소후 시인
광주 대의동 비움박물관 기획전시 미인도를 관람한다. 비움박물관은 지난 반세기, 한반도에 버려지다시피 나뒹굴던 민속품을 숙명처럼 모아서 닦고 어루만지고 보관하다가 좁은 공간이나마 ‘세월의 장터’로 세운 곳. 지금은 우리네 살림살이의 쓸모에서 멀어져 간 옛 물건들의 쓸쓸함과 그리움, 서러움의 몸짓들이 아름답게 남아있다. 이번 전시회도 한반도 반만 년의 역사 속에서, 불과 반 백년 만에 낯설은 대상으로 바뀌어 버린 ‘가난한 세상에서 태어나 밥 짓고 옷 짓고 복 지으며 자식을 지극 정성으로 키웠던 엄마’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놓고 온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지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 기획했다고 한다.

이날 만난 봄날 미인은 날카로운 호미를 들고 산수유꽃빛 저고리를 입고 카네이션꽃 같은 무늬가 그려진 치마를 입었다. 애기 단풍나무 새순이 초록초록한 언덕에 앉아 그리움이 지나가는 찰나, 그 순간의 미인을 그린 그림이 홍보용 걸개로 걸렸다. 미인은 지금 봄풀이 돋는 푸른 언덕에 앉아 쉬고 있다. 봄이니까, 미인이니까, 그리고 일하는 모습이니까 힘찬 그러나 조용한 휴지가 느껴진다.

여인의 모습이야 미인이니까 말해 무얼 할까 만은 ‘사군십이시 (思君十二時)’라는 화제가 씌여 있어 더욱 심금을 울린다. 그리움, 기다림, 보고지움을 그린다는 일은 신의 붓길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일이다. 그러나 우파(友波)의 이 그림 앞에서 숨을 죽인다. 12시는 옛 적에 두 시간을 한 시점으로 헤아렸다.

김수영 시인의 시 ‘미인’을 읽어본다. “미인을 보고 좋다고들 하지만/미인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그렇지 않고야 미인일까/미인이면 미인일수록 그럴 것이니/미인과 앉은 방에선 무심코/따 놓는 방문이나 창문이/담배 연기만 내보내려는 것은/아니렷다.”

이 시는 정말 단순히 미인을 묘사 서술한 시가 아니다. 옴 몸으로 시를 써낸 김수영 시인의 손가락으로 물 튀기 기법의 시는 또 한 번 숨을 죽이게 한다. 그는 산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이는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으니 현대 미학의 조건인 동적 미를 갖추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고 썼다.

우파가 그린 ‘사군십이시(思君十二時)’는 살면서 한 번 쯤 몹시도 그리운 대상을 종일토록 기다리며 진실의 미간을 모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눈썹과 콧날과 얼굴선을 바라보며 미인을 그린 작가의 마음에 접화(接化)되어 본다. 두 아이를 등에 업고 걸리고 국화꽃 밭에 서서 다정히 바라보는 애들 엄마 미인도. 엄마들은 이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한다. 그림에는 이런 화제가 씌여 있다. 佳色含霜向日開(곱게 서리 머금고 해를 향해 피었나니) 餘香염염覆苔(남은 향기 이끼에 덮여서 은은하도다) 獨憐節操非凡種(유독 절조 어여뻐 비범한 꽃 심었으니) 曾向陶君俓裏來(옛날 도연명처럼 길 따라서 오시리라)

청로 송부종 님의 고전번역으로 이 그림을 환하게 접근한다. 그림 속 여인의 절조를 기렸을 화가의 미션은 지금 세대들에게는 어려울까. 자본주의 사회가 더욱 어렵고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가는 일이 무거워서 저출산국이 되어가고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미인도 전시품은 40여 작품이다. 태극선을 들고 파초 곁에 서 있는 미인, 노랗게 익은 비파나무 아래 선 미인, 희일(禧日)을 위해 단장하는 여인, 정부인이 서책을 읽는 여인, 목욕하는 여인, 기녀 복장의 여인 등 미인도는 마음을 쓰담쓰담 해준다. 겨울 눈 내리는 날 검은 경도비단 두루마기와 머리 머플러와 꽃 신을 신고 채비하고 나서는 경성시대 미인, 옥잠을 꽂고 초승달 같은 눈썹을 그리고 먼데 시선을 던지는 미인, 가장 미인은 초례청에 선 원삼족두리를 쓴 신부일까. 주름투성이 노파 정화수 앞에 놓인 삼신 할매 일까. 미인도를 감상하면서 아름답던 나의 시절과 고단했던 한 때와 그리고 간절했던 기도가 겹쳐 지나간다.

시간 속의 사람, 시 속의 사람, 그림 속의 사람 등 미인도는 ‘현존의 존재’를 확인하는 넉넉한 시간이었다. 나는 어떤 공간 어떤 모습의 미학적인 미인으로 비추일 수 있을까. 미인도에 취해 있는 동안 비움박물관 이영화 관장이 “텅 빈 아름다움에 물음표로 쉼표로 느낌표로 위로받고 가시라.”고 한다. 이 시대의 미인 이영화 관장의 따뜻한 손길을 따라 이 아름다운 봄날이 이렇게 속절없이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