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진린 魂 서린 한·중 역사의 땅, 완도 고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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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이순신-진린 魂 서린 한·중 역사의 땅, 완도 고금도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⑤ 임란 조·명 연합수군 본영, 고금도||고금도, 임란 마지막 3도수군통제사 본영 설치||明나라 수군 주둔시 관우모신 관왕묘 세워 제사||묘당도에서 임란 7년전쟁 끝내는 노량해전 준비||노량서 이순신 순국후 80여 일간 월송대에 안장||진린 관왕묘 제사 부탁… 300년 넘게 약속 지켜||한·중·일 해상왕 장보고, 완도 장도에 군진 설치||中 견당매물사, 日 회역사 보내 국제무역 전개
  • 입력 : 2022. 08.31(수) 16:34
  • 최도철 기자

완도 고금도 충무사 완도군 제공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와 묘당도 일대는 임란 당시 조·명 연합수군이 주둔하면서 노량해전을 준비했던 유서깊은 한·중 우호의 장소이다. 또한 완도는 한·중·일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웅혼한 기상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남도-중국 인연자원 시리즈 여섯 번째로 '이순신과 진린의 혼이 서린 한·중 역사의 땅 완도 고금도'를 싣는다

고금도 충무사 관왕묘비

진린의 후손들이 고금도 관왕묘비를 둘러보고 있다.

이순신이 임시 안장된 고금도 월송대

진린과 이순신 초상화

2017년 중국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베이징대학 강연에서 "완도군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며 "한국에는 진린 장군의 후손들 2천여 명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과 한국은 근대사의 고난을 함께 겪고 극복한 동지" 라며 "동지적 신의를 바탕으로 양국 관계를 한 차원 더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201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시진핑 국가주석도 서울대 강연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 진린 장군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며 역사적 친근감을 내보인 적이 있다.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이 언급했던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와 묘당도 일대는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주둔하면서 연합수군을 편성, 노량해전을 치렀던 유서 깊은 한·중 우호의 장소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끈 후, 본영을 군산 선유도, 목포 고하도로 옮겼다가 1598년 2월 17일 수군 8000여 명을 이끌고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로 이진해 전열을 가다듬는다.

고금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왼쪽에는 마량, 오른쪽으로는 약산의 좁은 수로를 두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섬 안이 기름져 군량을 확보하기가 좋은 곳이었다. 고금도로 본영을 옮긴 후 이순신은 수군을 조련하고 전선을 건조하는 등 임진 7년전쟁을 끝낼 마지막 전투 준비에 진력했다.

조선 수군이 고금면에 본영을 설치하자, 한강 유역에 머무르고 있던 명나라 수군 진린 도독 휘하의 5000 수군이 동작나루에서 선조의 전송을 받고 고금도로 출발했다. 서해안을 따라 남진한 후 7월 16일 고금도에 도착하여 덕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묘당도에 진을 쳤다. 이때 진린 도독은 묘당도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다.

관왕묘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촉한의 장수 관왕, 즉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우리나라에는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의 동관왕묘(동묘)와 임란 당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군영에 머물면서 직접 지은 묘당도 관왕묘가 대표적이다

고금도에 조선과 명 수군의 본영이 설치된 그해 11월 조명 수군 연합부대와 왜군이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장수 등자룡이 숨졌다. 이에 진린 도독은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고금도의 월송대에 임시 안장했다.

수 백년이 흘렀지만 이순신과 진린, 등자룡, 관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조명 연합수군의 주둔지 완도 묘당도는 한·중 우의를 다지는 중요한 유적으로 오롯이 남아 있다.

관왕묘는 시대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지금의 고금면 충무사(忠武祠)는 본래 관왕묘가 있던 자리이다. 관왕묘는 선조 31년(1598) 명나라 수군이 고금면 묘당도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진린 도독이 꿈에 나타난 관우(관운장)를 제사지내고 휘하들의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후 사당이 쇠락하자 현종 7년(1666) 수군절도사 유비연이 중수하고 동무에는 진린을, 서무에는 이순신을 모시고 곁에 암자를 지어 승려 천휘로 하여금 사당을 돌보게 했다. 이후 영암, 강진, 보성, 해남 등 인근 6개 부·군현 관원들이 한 해 두 차례 제사를 모셨다.

정조는 관왕묘에 '큰 나라의 뜻에 보답한다'는 뜻을 담은 탄보묘(誕報廟)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명나라 수군 장수인 등자룡을 함께 모시게 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맞아 관왕묘는 관왕상과 위패,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일체가 철거되고 유실되면서 급속하게 훼손된다. 광복 후 관왕묘의 옛 자리에 충무사를 새로 짓고 이순신을 정전에, 노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가리포 첨사 이영남을 동무에 모시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

관우를 모신 관왕묘는 명나라 수군들을 위해 건립되었지만,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 수군 장수 등자룡을 제향하면서 한·중 우의를 다졌던 사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관왕묘는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관왕묘는 헐리고, 묘비만 남아 있다. 관왕묘비는 관왕묘의 역사 뿐 아니라 묘당도가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의 근거지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중심 유물이다.

완도군은 지난 2020년부터 이충무공 유적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공원화 사업과 관광자원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금면 충무리 묘당도 일원에 충무공 이순신 전시관 건립, 이순신 생태공원 조성, 관왕묘 재건 등에 나선다. 아울러 고금면 덕동리와 윤동리 일원에 삼도수군통제영과 봉수대, 활터를 재현하는 등 조명 연합수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적인 현장을 관광과 접목한 교육·체험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 한·중·일 해상왕 장보고의 군진 '청해진'

완도 장도 청해진 유적지

중국 산동반도 법화원

완도 장보고 동상

완도에는 한·중·일 해상왕으로 이름을 떨친 장보고의 군진 '청해진'이 있다. 청해진(淸海鎭)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통일신라 때의 장군 장보고(張保皐, ?~846)가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소탕할 목적으로 흥덕왕에게 청하여 완도읍 장좌리 장도에 설치한 군진이다. 청해진은 본래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이후 중국과 신라, 일본을 잇는 중계 무역을 통해 해상을 장악한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 전진기지의 역할을 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서남해안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에는 견당매물사, 일본에는 회역사를 보내는 등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을 남긴 일본의 승려 엔닌도 중국에 들고나면서 장보고 선단을 이용했다. 중국의 적산, 양주, 명주(영파)와 일본의 하카다(후쿠오카)에도 장보고 선단의 교역 흔적이 남아 있다.

청해진이 설치된 곳은 완도의 본섬인 장좌리 마을에서 100여m 정도 떨어진 장도로,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경사가 완만한 섬의 남서쪽에 목책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장도의 발굴 결과를 토대로 고대(高臺), 중문, 남문 등을 복원해 사적 제308호 '장도 청해진 유적'으로 지정됐다. 청해진 유적 근처인 완도읍 죽청리에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팔을 뻗은 15.5m 크기의 장보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장보고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780년대 후반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대에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후 강소성 서주의 무령군(武寧軍)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병사 1000여 명을 거느리는 군중소장이 되었다.

이후 장보고는 산동반도의 등주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세웠다. 법화원은 산동반도에 세워진 신라원 가운데 하나였다. 법화원은 불법을 구하고 무역을 위해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숙박지였으며, 재당 신라인과 함께 예불도 드리고 정보도 교환하는 사랑방이었다.

귀국 후 장보고는 흥덕왕의 도움으로 군사 1만을 얻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신라인들을 당에 팔아넘기던 해적들을 소탕했다. 이후 장보고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동북아 해상항로를 개척하고, 청해진을 본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와도 교역한 아시아 최초의 민간기업인이자, 세계적인 무역왕이 되었다. 청해진은 군사 요충지를 뛰어 넘어 아시아 삼국의 무역을 총괄하는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