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장> "좋은 마음으로 빚는 술에선 단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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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반
명인·명장> "좋은 마음으로 빚는 술에선 단맛이 납니다"
‘충장로의 보물’ 동구의 명인·명장을 찾아서||⑥노진양 전통주 장인||광주 지산동서 ‘자헌연구소’ 운영||남편 암 치료 건강 먹거리에 관심||1998년 ‘대가’ 박록담 선생 사사||직접 담근 ‘무등사계’ 백화주 명성||“많은 사람들이 전통주 알았으면”
  • 입력 : 2022. 05.02(월) 10:59
  • 곽지혜 기자

노진양 전통주 장인은 "빚는 사람의 심성이 그대로 녹아 나는 것이 술"이라며 "와인이나 사케 같은 외국 술보다 우리 전통주가 가진 매력을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맛과 향이 더욱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전통주 장인 노진양 소장의 술에 대한 애정과 정성스레 빚어낸 우리 전통주도 그 중 하나다.

무등산 자락 소담하게 마련된 전통주 연구소이자 노 소장의 사랑방인 '자헌연구소'는 쌀과 누룩이 익어가는 향기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남편,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직접 만든 술 한잔을 나누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말하는 노진양 장인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노진양 전통주 장인이 광주 동구 지산동에 위치한 자헌연구소에서 삼해주를 담그고 있다. 삼해주는 술 빚은 지 12일 간격 또는 36일 간격으로 덧술을 해서 최소한 36일 이상 또는 108일이 돼야 술을 뜰 수 있는 장기 저온 발효주로 맛과 향이 뛰어나 명주로 손꼽히는 술이다.

● 전통요리 배우다 전통주 만나

23살 어린 나이에 남편을 만나 평범한 가정주부로 자녀들을 키우며 살아왔던 노진양 소장의 삶은 남편이 40살 무렵 암에 걸리고 나서 급변하기 시작했다.

노 소장은 "9살 차이 나는 남편이 쌀통에 쌀을 부어줘야 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의지하고 살았다. 당시 아이들은 겨우 초등학교 5학년, 1학년이었고 저 사람 없으면 내가 살 수 없겠구나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방송이고 책이고 몸에 좋다는 음식은 전부 찾아 먹여 남편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구했다"고 회상했다.

유기농 채소를 먹이기 위해 텃밭에서 각종 농산물을 직접 길러냈다. 치료비와 약값으로도 턱없이 부족했던 남편의 월급에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나주에서 지원금을 받아 배 농사도 시작했다.

매일 아침 남편과 아이들 몫까지 도시락 5개를 싸두고 버스를 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후 다시 광주로 돌아와 3~4시간 쪽잠을 자며 버틴 시간 끝에 남편의 암은 완치됐지만, 노 소장에겐 자신을 위한 휴식과 활력이 필요했다.

노 소장은 "당시 광주에 롯데백화점이 생겼는데 문화센터에서 전통요리를 배울 수 있는 강좌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며 "당시 남편 때문에 건강식, 사찰 음식에도 관심이 많던 터라 일주일에 하루는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워도 되겠다는 마음으로 전통요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통음식과 함께 삶의 활력을 되찾던 노 소장에게 1998년 전통주의 대가라 불리던 박록담 선생과의 만남은 전통주에 대한 눈을 뜨이게 한 순간이었다.

우연히 그의 전통주 수업을 듣게 된 노 소장은 그날로 술 빚는 매력에 빠져 일주일에 한 번 전통음식이 아닌 전통주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기초부터 연구반, 지도자반까지 모든 과정을 수료하고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술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노 소장은 "처음 배웠던 술이 4월에 소나무 새순으로 빚을 수 있는 송순주였다. 아직도 그때 빼곡히 적은 레시피를 갖고 있을 정도로 전통주의 매력에 푹 빠졌던 것 같다"며 "지금도 서로 만든 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좋은 재료가 있으면 보내드리기도 하면서 막역하게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광주 동구 지산동에 위치한 자헌연구소 내 노진양 전통주 장인의 연구실.

● '무등사계' 백화주로 장인 반열

노 소장의 전통주가 지역에서 입소문이 나게 만든 술은 바로 '무등사계'라는 백화주다.

백화주는 이름 그대로 꽃으로 향을 내는, 100가지 꽃이 들어간 술을 말하는데, 백화(百花)란 실제로 100가지 꽃을 지칭하기보다는 '많은' 혹은 '완성'이라는 의미로 여러가지 꽃을 이용해 빚은 술이나 그 계절에 만개한 꽃을 활용해 빚은 술을 뜻하기도 한다.

노 소장은 "전통주는 곡물로 만드는데 1년 내내 같은 술을 빚어 조금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꽃술을 담그기 시작했다"며 "봄이면 매화부터 복숭아꽃, 살구꽃, 탱자꽃, 제비꽃, 아카시아, 국화 등 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이용해 술을 담그니 철철이 재미와 기대를 느끼던 중 지금의 '무등사계'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다채로운 꽃의 향기가 그득한 노 소장의 백화주는 처음에는 편의상 자신의 호를 딴 '자헌백화주'로 불렀지만, 예로부터 술에는 사람 이름이 들어가면 안된다는 말에 노 소장이 '무등사계'라는 이름을 직접 붙였다.

노 소장은 "무등산 자락에서 술을 빚고 사계절 꽃이 들어가니까 '무등사계'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어디에 상표가 등록됐거나 누가 공인해준 것이 아닌 그저 제가 만들고 제가 이름 붙인 술이다"고 전했다.

실제로 노 소장의 '무등사계'는 음식박람회나 전통주 전시회 등에서 만나볼 수 있지만 사서 맛볼 수는 없는 술이다. 주류제조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전통주 강연을 시작하고 술맛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허가를 내고 판매하면 좋겠다는 권유도 많았지만, 노 소장은 지금까지도 한사코 거절하고 있다.

그는 "우리 전통주를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어디든 불러주는 곳이면 강연은 나가지만, 사업을 해서 술을 많이 팔고 유통되고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일축했다.

노 소장은 "일단 대량생산을 통한 유통을 하게 되면 제 손이 닿을 수 없는 곳들이 생기고 술맛을 보존할 수가 없다"며 "술 빚는 사람을 주인(酒人)이라고 하는데 주인의 마음이 녹아나는 것이 전통주의 진짜 매력이다. 제가 마음으로 빚어낸 술은 찾아오는 누구에게라도 맛을 보여드릴 수는 있지만, 다른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순간 술맛도 변하고 제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노진양 전통주 장인이 광주 동구 지산동에 위치한 자택 겸 연구소에서 전통 증류 기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건강한 음식과 술 널리 알려지길"

노 소장은 20여년 전 화순농업기술센터에서 전통주 강의를 시작으로 광주김치타운, 동구평생교육원, 각 자치단체의 농업기술센터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노 소장은 "젊은 사람들은 우리 전통주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요즘 시중의 인위적인 단맛이나 신맛을 내는 자극적인 음식과 술보다 발효를 통해 만들어진 전통적인 신맛은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몸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다"며 "그래서 젊은 분들이 전통주에 관심을 갖고 강연을 들으러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남편과 어느 날은 막걸리, 어느 날은 청주, 어느 날은 백화주 한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그녀의 꿈은 전통주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노 소장은 "전통주 강연을 나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먹으면 안되는 음식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라며 "남편 몸을 치료하기 위해 건강한 음식을 배우고, 또 전통주를 배워 지금까지 술을 빚어오고 있는 만큼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다"고 전했다.

자신의 술을 맛본 누군가가 '광주 동구 지산동 자락 어딘가에 그 선생 술맛이 그렇게 좋았어'라는 한 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더이상 바랄 것 없다는 노 소장의 전통주는 오늘도 그 맛과 향기를 더해가고 있다.

곽지혜 기자 jihye.kwa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