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간 겨우 견뎠지만… 떠날 수 없는 화정동 유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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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29일간 겨우 견뎠지만… 떠날 수 없는 화정동 유족들
"고인 희생 헛되지 않도록 현산에 맞설 것 "||"다신 안전사고 없어야… 추모 방문 감사”||제대로 된 사과·처벌까지 장례 무기 연기
  • 입력 : 2022. 02.13(일) 16:55
  • 도선인 기자

지난 12일 광주 서구 현대산업개발 신축 아파트 붕괴사고 인근 주차장에 마련된 합동 분향소에서 유가족 등이 추모하고 있다.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 측의 사과와 보상 약속을 요구하며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있는 유가족 측은 영정사진과 위패 등을 분향소에 안치하지 않았다. 나건호 기자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계셨던 곳이잖아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요.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붕괴사고 현장을 지키는 게 제 몫인 거 같아요."

지난 8일 HDC현대산업개발(현산) 아파트 신축공사 붕괴사고 관련 29일간의 구조활동이 마무리되면서 구조 인력과 장비들이 모두 철수했지만, 유족들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다.

처참히 뜯긴 건물 단면을 바라보는 일이 고통스럽지만, 현산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기 위해 현장을 떠날 수 없다.

29일간 견뎌냈던 긴 기다림 끝에도 아버지 장례를 치르지 못한 아들 김명보씨가 돌아온 곳은 화정동 붕괴사고 현장의 임시 천막이다.

김씨는 "마지막까지도 소식이 없던 아빠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수습 순서까지 우리 아빠는 운이 없나 그런 생각이 들어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아빠를 건축현장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를 대신한 마지막 희생자라 생각할 거다"며 "아빠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계셨던 곳에서 아버지를 대신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여수산단에서 폭발사고가 또 일어나 참 착잡하다"며 "건축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는 올해 화정동이 가장 큰데, 유족끼리 연대해 건축현장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달 14일 가장 먼저 수습된 첫 번째 피해자의 아들 김모씨는 유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장례를 먼저 치렀지만, 지난 29일 동안 계속 광주를 찾았다.

13일에도 김씨는 시민 합동분향소를 지키며 시민들의 추모 인사를 받았다.

김씨는 "아버지가 제일 먼저 구조됐는데, 그때는 상황이 이렇게 장기화될지 모르고 경황없이 장례를 치렀다"며 "그래도 다른 유족들과 같은 맘이다.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때까지 사고현장을 지키고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의 추모 인사를 받을 예정이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수습된 이후에도 실종자가 나올 때마다 광주를 찾았다. 김씨는 "집이 서울이라 계속 광주에 있진 못했지만, 이슈가 생길 때마다 광주에 왔다. 광주를 처음 왔는데, 벌써 이 거리가 익숙하다"며 "아직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실감이 안 난다. 저번에 잔재물이 크게 떨어졌을 때 심장이 벌렁거려 혼났다. 제발 다치는 분이 없길 빌었다"고 전했다.

황망한 슬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유족과 시민들 덕이었다.

HDC현대산업개발 아파트 신축공사 붕괴사고 관련 첫 번째 피해자 아들 김 모 씨가 시민들이 전해온 후원 물품을 사진으로 기록해뒀다.

김씨는 "장례식장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는데 잡아준 사람은 같은 유족들이었다"며 "가족들이 머무는 임시 천막에도 참 많은 분이 찾아줬다. 특히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음식을 전해준 시민들 …. 손자가 있었던 피해자를 생각해 인형이나 장난감 선물을 전해온 분도 있었다. 감사할 뿐이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두 번째로 발견된 피해자 아들인 김모씨도 서울이 집이지만 주말마다 광주에 내려오고 있다. 김씨는 "제대로 된 사과도 없었기에 장례를 미루기로 합의했다. 말 뿐인 사과가 아닌 진정성 있는 사과가 중요하다"며 "유족들 모두 힘없는 일반인이다. 사실 현장에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나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니깐 주말마다 내려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쳇바퀴 돌 듯 반복될 것이다"며 "앞으로 누구든지 이런 붕괴사고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 아이파크 붕괴사고 희생자 가족협의회는 합당한 가해자 처벌, 진정성 있는 사과, 충분한 보상 등 사고수습과정이 완료될 때까지 장례 절차를 무기한 미루기로 했다.

또 유족들은 현산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며 합동분향소에서 관련 시민 서명을 진행하고 있다.

안정호 가족협의회 대표는 "현산은 광주에서만 1년 안에 2번의 사고를 일으킨 연쇄살인 기업이다. 무책임한 현산에 나약하게 굴복한다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지 못할 것이다"며 "현산이 책임을 회피하도록 놔둔다면 또 다른 희생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우리 가족의 희생이 본보기가 돼 산업현장의 사고가 중대하게 인식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