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장성 관수정, 수강사 유허지_효헌공 지지당 송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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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연의 문향
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장성 관수정, 수강사 유허지_효헌공 지지당 송 흠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선비, 지지당 송흠||송흠, 수군개혁론을 주장하다||일곱번 청백리에 녹선, 청렴과 효행의 아이콘
  • 입력 : 2020. 01.30(목) 14:29
  • 편집에디터

1. 지지당 송흠의 신도비(왼쪽)

동서고금을 통한 최고의 재사(才士)는 누구일까? 난세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명멸하였지만, 지금까지 그 이름이 높이 회자되는 인물은 장량과 제갈량이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은 다른 시간 속에서 전쟁의 시대를 살며 정의와 지혜로 한 세상을 풍미했다. 오늘 이야기는 '지지(知止)'에 관한 것으로, 멈추는 것을 아는 장량으로부터 시작한다. 장량의 자는 자방으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장자방이다.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더불어 '한삼걸'로 불린다.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한(漢)을 세웠다. 유방은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장자방이다."고 했다. 그 후 사람들은 유능한 참모를 '나의 장자방'이라고 한다. 한의 통일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 장자방은 조그만 유후지역의 제후를 청하고 몸을 낮추어 은둔해 버린다. 관광지로 유명한 장가계(張家界)가 그곳이다. 장자방은 건국 초기 모반과 반란에 연루되지도 않았고, 한신이나 영포·번쾌처럼 토사구팽을 당하지도 않았다. 권력과 부에서 초연히 물러나 안분지족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그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지지(知止), 모든 일에 멈춰야 할 때를 알고 멈추었기 때문이다. 지지(知止)는 장량을 살리는 언어이고 이념이었다.

조선시대 장성 삼계현에 지지(知止)를 신조로 삼고 실천한 인물이 있었으니,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흠지, 호는 지지당·관수정(觀水亭). 시호는 효헌공이다. 장성 삼계면 정각마을에서 아버지 송가원과 어머니 하동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자와 청백리로 존경을 받으며 연산군 혼조(昏朝)와 사화(士禍)의 난세에는 기미를 살펴 옷깃을 여미고 은둔하였다.

설을 앞둔 새해, 새 마음으로 장성에 간다. 지지당 송흠, 하서 김인후, 아곡 박수량, 요월정의 김경수, 망암 변이중, 고산서원 기정진, 기삼연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배출된 곳이니, 문불여(文不如) 장성이다. 지지당을 찾아 삼계면으로 간다. 답사 다닐 때는 늘 문중 분들에게 신세를 진다. 신평송씨 문중의 송병대 전 회장, 송병산 회장, 송무현 총무 등 후손 분들이 설 연휴인데도 나와 자료도 주고 여러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지당은 성종 1492년,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관직에 입문, 사헌부 지평, 승지, 전라도사, 나주목사, 병조판서,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 등 51년간 내·외직으로 관직을 역임했다. 재물을 탐하지 않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해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다. 포상을 일곱 번이나 받은 명신으로, 8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청렴과 지지(知止)의 일관된 삶을 살았다.

송흠은 지지당 호 외에 삼마태수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부임할 때 관례적으로 관직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역마의 수를 법으로 정해 놓고 있었는데 부사의 경우 짐을 운반하는 태마 1필을 포함하여 모두 7필 정도의 말을 쓸 수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 지방관은 7~8필 이상의 말을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부임하기 일쑤였는데 송흠은 항상 신영마 3필뿐이었다. 본인이 타는 말과 어머니와 부인이 타고 가는 말 세 마리로 간소하게 행차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삼마태수' 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삼마태수는 그의 별호가 되었으며 청백리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삼마태수라는 말을 듣는 동기가 있다. 송흠이 홍문관에 있을 때, 고향 선배 금남 최부(표해록의 저자)와 같이 근무를 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휴가를 가서 마침 이웃 마을에 와 있는 최부를 만나러 갔다. "나를 찾아오는데 말을 타고 오느냐"며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된다. 이어 상경해서 파직까지 당했는데 송흠은 뼈에 사무치게 받아들여 공직에서 늘 청렴하게 직무에 임했다. 송흠은 최부를 원망하기는커녕 참스승으로 모셨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최부가 연산군 갑자사화에 처형될 때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송흠이었다. 여한을 물으니, 최부는 무안의 부모 산소에 아직 석물을 다듬어 세우지 못했고 또 막내딸을 미처 시집보내지 못해 걸린다 하였다. 송흠은 뒤에 전라감사가 되어 부임해서 묘소에 석물을 세우고 딸을 응교 김자수의 아들과 정혼시켜 그 의리를 지켰다.

송흠은 1515년 여산군수로 있을 때 '호산춘'이란 술을 빚어 접대 예산을 절약했다. <지지당유고>에 호산춘 담그는 법이 한문과 한글로 적혀 전해온다. 전라도 여산춘은 서울의 약산춘, 충청도의 노산춘과 함께 3대 민속춘주로 유명하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낼 때, 98세 고령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 두었다. 모친 곁을 떠나지 않고 춥거나 덥거나 의관을 풀지 않았으며 음식물은 반드시 맛을 본 뒤에 올렸다. 어머니가 101세의 나이로 돌아가시자 선생은 80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런 지극한 효행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관수정(觀水亭)은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천방마을, 송흠의 신도비가 '신평송씨세장비'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을 한 사람의 묘소 남동쪽 큰 길 가에 세우고 주인의 행적을 적는다. 이곳은 신도비가 있을 자리가 아닌데 바로 앞으로 도로가 나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지지당은 1539년 9월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1월 부인 하음봉씨와 사별했다. 이듬해 선방산 아래 '그 물결을 보면 물의 근본이 있음을 알고, 그 맑음을 보면 마음의 사악한 점을 씻게 되니 그런 연휴에야 가히 물의 참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는 뜻의 관수정을 지었다. 관수정에 오르면 지지당 주인 자서라고 적힌 관수정기 편액이 있고 바로 옆에 소세양의 차운시와 또 제자였던 양팽손, 송순과 김인후, 모재 김안국, 임억령, 송흠의 둘째아들 송익경, 정사룡, 이문건 등 당시의 시인 문객들과 교류하며 남긴 편액이 걸려있다. 관수정의 편액들은 <지지당유고>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의 학통을 이어 받은 인물로 양팽손, 양응정, 최경희, 백광훈, 최경창, 김경희, 정명세 등이 있다. 모두 수제자들이다.

마당에는 세 개의 비가 있다. 하나는 지지당이 87세에 지은 <가훈>을 적은 비이다. '주자시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충과 효 밖에는 바랄 것이 없다 하였으니 사람이 사람됨은 충과 효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손들은 삼가고 경계하라.'는 내용이다. 그 옆엔 이도(吏道)의 등불로 청백리로서 삼마태수, 호산춘, 어사주에 관한 일화를 설명한 비가 있다.

관수정을 지나 재실 '요산재' 사이에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다. 245개의 계단을 오르니 선방산 정상에 세 기의 묘가 있는데 송흠의 묘는 가장 위쪽에 있다.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공지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와 묘갈비가 있다. 묘갈비 윗부분에는 '판중추부사 겸 세자이사 지지당 송선생 묘갈명'이라 적혀있다. 가운데 묘는 후손인 공조참의 송공의 묘이고, 맨 아랫부분에 비석이 없는 묘가 있다. 궁금하여 물어보니 문중에서 평양할머니라고 구전되어 내려오며 제사를 함께 모신다고 한다. 81세에 부인 하음봉씨가 먼저 떠나고 난 후 함께 산 애첩이거나 진짜 평양에서 온 기생이었을까. 오래 전 영암 동계사에서 만난 고죽 최경창과의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 홍랑이라는 기녀가 오버랩 된다. 영화 한 편이 흘러간다.

관수정에서 용암천을 따라 200m 정도 가면 삼계면 사창리에 기영정(耆英亭)이 있다. 중종(38년) 임금이 전라도 관찰사 규암 송인수에게 명하여 오랫동안 청백리로 관직생활을 마친 송흠의 편안한 여생을 위해 건립하도록 하였다. 북쪽을 바라보니 다녀 온 관수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송흠의 지지(知止)의 철학에서 비롯된 청렴과 효행의 덕분일까. 여유있고 아름다운 만년의 그림들이 펼쳐졌으니 참으로 기영하고 관수하는 지지의 삶이었다. 기(耆)는 70세 노인을, 영(英)은 가장 빼어난 풀을 의미하므로 '나이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를 의미한다.

송흠이 86세이던 1544년 왜구가 경상도 사량진 포구를 습격하여 수군이 죽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송흠은 병조판서, 보성군수, 장흥부사 등 해안지역의 수장을 한 경험을 살려 중종에게 왜구와 중국 해적을 막기 위해서는 수군의 역량 강화와 수군을 개혁해야 한다는 상소를 한다. 중국의 당선처럼 판옥선을 제조하고 무기와 화포를 개량, 우수한 장군과 용감한 수군의 정예화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1555년 판옥선이 만들어졌으며 그로부터 37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삼계면 수옥리 수각마을에 있는 수강사지(址)로 간다. 수강사지는 송흠을 우봉 용암사에서 주벽으로 이배 주향하기 위해 1702년(숙종 28년)에 건립하였으며 죽곡 이장형이 추가 배향 되었다. 그러나 수강사는 고종 때 훼철되었다. 지금은 유허지에 수강서원 유허비와 주춧돌 몇 기가 있다. 덤불을 헤치니 '수강서원 유허비'가 보인다. 장성에서 박수량과 함께 청렴의 아이콘이며 문불여 장성을 청백리의 고장으로 만든 인물인데, 청렴과 충효의 교육장으로 충분한 활용이 아쉽다.

문중 송병산 회장은 "송지지당 할아버지의 청백리와 효행이 명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아 평소 아쉬움이 많습니다. 관수정에는 유물, 유품 등을 전시할 공간이 없고 건물만 있는 형태죠. 그리고 읍에서 멀어 연계가 어렵습니다. 후손으로서 항상 죄스런 마음이지요. 수강사도 유허지만 있으니 안타깝지요. 문중에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고 조금씩 나아질 겁니다. 그리고 <지지당유고>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지지당 할아버지께서 86세에 수군개혁론을 상소하여 판옥선이 만들어지고 임진왜란에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전력함이 되었는데 사실 문중에서도, 외부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홍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고 말했다.

명종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나라를 위해서는 청백한 관리로 대우를 받고 가정에서는 효자로서 부모를 섬겨 세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수강사지를 나오는길, 지지당 송흠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 지지(知止)와 청렴·효도가 그대로 드러난 윤증이 지은 묘갈명 첫 구절을 읊어본다.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 萊子嬰兒之啼

백기 양진은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 伯起暮夜之知

소부는 동문밖으로 물러 나고 / 疏傅東門之退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네 / 潞公洛社之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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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 기원후 56년 계해 파평 윤증 지음

천방마을 입구에 있는 관수정, 뒤에는 선방산이 앞에는 용암천이 흐른다. 신도비, 세장비, 관수정이 있다. _사진 백옥연

관수정

삼계면 사창리에 위치한 기영정. 전라도 관찰사 규암 송인수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 송흠을 위해 관수정 건너편 용암천 위에 지은 정자.

묘소에 오르는 계단. 관수정을 옆으로 나와 245계단을 오르면 선방산 정상에 묘소가 나온다.

수강사 유허비(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각마을).1702년 송흠의 신위는 용암사에서 수강사로 옮기었고 1868년 훼철된 후 그 터에 유허비만 세워져 있다.

효헌공 지지당 송흠의 묘소에 있는 문인석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