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전하는 희로애락… 깊은 감동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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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소남의 통기타 이야기
소리로 전하는 희로애락… 깊은 감동 선사
국소남의 통기타는 영원하다 18. 광주 포크 반세기 - 라디오 시대
미군 방송 'AFKN' 통해 최신 팝 음악 청취
길거리 레코드점ㆍ악기점 '노래 전파' 첨병
광주 상권 집중된 '충장로' 문화 중심지로
  • 입력 : 2017. 03.30(목) 00:00
1965년 광주 충장로 1가 주변 모습. 좌측 상단이 상공장려관(옛 전남도청), 우측 중앙 공터가 옛 광주시청, 좌측 하단이 동방극장(옛 무등극장)이다. 광주시청 제공
●라디오는 '귀신상자'였다

나는 광주에서 라디오로 팝을 듣고 자랐다.

1927년 2월16일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 방송이 시작되자 당시 사람들은 라디오를 '귀신상자'라 여길 정도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그 형태가 바뀐 라디오는 해방 뒤 1956년 최초로 라디오 주간 연속극 '청실홍실'이, 1966년 KBS 라디오 드라마 '하숙생'이 전파를 타면서 어려운 시대에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드라마가 엮어내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소리를 통해 전달,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흥미를 결합시켜 감성을 자극하고 감동을 줬다. 그것이 라디오 드라마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우리는 1960년대에 들어서야 외국의 음악 흔히 말하는 팝과 샹송, 그리고 칸소네 등을 라디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AFKN, 주한미군방송

AFKN(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은 1950년 10월4일 미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 부대를 따라온 미군 방송 요원들에 의해 서울에서 첫 전파를 발사했다. 1957년 8월 TV 방송을, 1964년 FM방송, 1971년 FM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했다.

한미협정(SOFA)에 따라 설립된 미군방송의 국내방송은 주한미군에게 정보, 교육, 오락 프로그램 등을 제공했다. 서울 용산에 키 스테이션을 비롯해 문산, 오산, 동두천, 의정부, 평택, 금산, 춘천, 원주, 대구, 포항, 경주, 진해, 군산, 광주 등 15개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5개 지방 네트워크를 통해 방송되는 미군방송 프로그램들은 여과없이 전파를 탔기 때문에 미국의 팝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AFKN의 'Cassy Casum'이나 'Wolf man Jack'의 방송에 귀를 기울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레코드가게ㆍ악기점 통해 팝을

팝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라디오나 음악감상실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나는 광주시내 곳곳의 레코드 가게, 전파사, 악기점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어린시절 귀동냥하면서 듣고 자랐다. 선배들이나 집안에서 나이 많은 형, 누나들이 흥얼대는 팝송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1960년대 초ㆍ중학교 시절 광주의 명동이라 칭하던 충장로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레코드 가게나 악기점 스피커에선 외국음악들이 종일 도로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유행하던 팝이 흘러나오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곡이 끝날때까지 듣곤 했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청소년 시절, 나는 'Benny Good Man'악단이나, Paul Anka가 노래했던 'Sing Sing Sing', Harry Beal Fonte의 'Banana Noat day-o' 등의 노래를 거리의 스피커를 통해 듣고 배웠다. 충장로의 악기점이나 레코드가게는 팝음악 전파의 첨병 역할을 했다.



●광주 문화의 중심 '충장로'

1960년대 서울 문화의 중심은 명동이었다. 패션과 음악, 다양한 볼거리로 몰려 있어 젊은이들의 집합소였다. 광주는 충장로였다. 유행의 물결이 충장로부터 비롯되던 시대였다.

그만큼 상권이 충장로에 집중됐고,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는 충장로가 유일했다. 지금의 광주는 인구가 약 160만명에 5개 구로 운영되고 있다. 광주부에서 광주시로 승격된 것은 1949년 8월15일이었다. 이후 1973년 동구와 서구가 신설됐고, 1980년 북구가 설치됐고, 1986년 11월 광주직할시로 승격됐다. 1988년 광산구 편입, 1995년 광주광역시로 개칭되고 그해 3월에 서구에서 남구가 분리돼 지금의 빛고을 광주가 됐다.

1960년대 광주 충장로에서 상권이 가장 활성화된 곳은 충장로 4가와 5가였다. 1987년 충장1가에서 3가까지 지하상가가 생기고 3가와 4가 사이 도로가 확장되면서 상권은 1~3가쪽으로 이동했다.

충장로에는 레코드가게와 악기점이 많았다.

1950~1960년대 초반엔 빅토리아 레코드사가 충장로 3가에, 1954년~1960년대 후반에는 명향당 악기점이 충장로 4가 화신다방 건너편,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 광주 소리사가 충장로 4가 화신백화점 코너쪽에 위치했다.

이 외에도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엔 우주소리사,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남해당악기점, 1960년대부터 운영된 빅토리 레코드사도 있었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이 됐지만 정해지지 않은 공간과 시간속에서 옛 올드 팝을 들을 수 있었던 곳이 충장로 거리였고, 악기점과 레코드사가 노래 전파의 한 축을 담당했다.



●DJ와 통기타가수는 '바늘과 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디스크(Disk). 이 디스크는 노래를 하는 가수가 만들고, 만들어진 디스크는 DJ(Disk Jockey)에 의해 들려진다. 누가 뭐라해도 바늘과 실의 관계다.

음악의 실체적 형태는 소리 즉 음의 질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작업부터 시작되고, 디스크 즉 음반이라는 결과물로 태어난 것이다. 음반을 소개하고 들려주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디스크 쟈키라 부른다.



●한국 DJ의 효시 최동욱

1959년 서울 종로의 '디쉐네'라는 음악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동아방송에 특채돼 방송을 시작한 사람. 한국 최초의 DJ 최동욱이다.

동아방송에서 1964년 베르트 캠페르트의 'That happy feeling'을 시그널로 사용하며 시작한 방송이 유명한 '3시의 다이얼'이란 프로였다. 8년간 진행을 맡았다. 한때 오전에는 탑튠쇼를, 저녁에는 0시의 다이얼을 진행했다. 동양방송으로 옮긴 뒤 최동욱 쇼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1991년 LA미주한인방송의 '라디오서울'에서도 진행을 맡았다. 2005년 귀국해 현재까지 독자적으로 방송을 하고 있다. 아들 최성원은 부산 교통방송에서 DJ로 활약중이다. 지난해 10월31일 부산교통방송에서 부자가 DJ로 공동진행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DJ 트로이카' 시대

1965년 DJ 고(故) 이종환이 MBC라디오 PD로 입사, '한밤의 음악편지'의 프로듀서를 맡은 후 탑튠 퍼레이드를 연출ㆍ진행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디스크 쇼', '이종환의 음악살롱', 그리고 최유라와 '지금은 라디오시대' 프로를 10여년간 진행해 당시 최고의 청취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5년 TBC에서는 동아방송의 최동욱, MBC의 이종환에 필적할만한 DJ를 물색하다 결국 자사 성우였던 피세영을 정책적으로 내세워 뮤직텔스타란 프로그램으로 대립각을 이루게 한다. 이로써 DJ 트로이카 시대가 도래했다. 통기타 가수ㆍ문화공연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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