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교준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장 |
아렌트가 눈여겨 본 점은, 아이히만이 습관적으로 관청 용어, 즉 ‘상투어’를 쓴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사용하는 ‘상투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일말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투어를 쓰는 일은 ‘생각하지 않음’(thoughtless)의 반증이었다. 말하기의 무능이 생각의 무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거대한 악으로 치닫는다는 것. 이것이 아렌트가 주목한 악의 뿌리, 즉 ‘악의 상투성’(banality of evil)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더듬더듬 읽어가다 보면, 아이히만이 처음부터 유대인 학살에 열심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치의 집권이 본격화되고 독일 사회에서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히만은 몰래 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나서 이민을 권하는 등, 유대인의 피를 흘리지 않고 국외로 이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럼 언제, 무엇을 계기로 아이히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이히만이 되었을까?
1941년 아이히만은 베를린 모처에서 열린 국가차관회의에 자신의 상관인 하이드리히와 참석하여 회의를 기록하게 된다. 이 회의의 주요 안건은 ‘최종 해결책’ 즉 유대인을 학살하는 문제를 전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각 기관의 모든 노력들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아이히만은 이 회의를 잊을 수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렌트의 긴 설명을 따라가보자.
<이 회담 날이 아이히만에게 잊혀지지 않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가 최종 해결책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지만 그는 여전히 ‘폭력을 통한 그러한 피투성이의 해결책’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의구심들이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이 회담에서 가장 유망한 사람들이, 제3제국의 교황들이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 뿐만 아니라, 친위대나 당뿐만 아니라, 착하고 연륜있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 ‘피투성이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 명예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었다. 아이히만이 기억한 것처럼 그 이후로는 (유대인 학살이) 점점 더 쉬워지고 또 곧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는 ‘강제 이주’의 전문가였던 것처럼 재빨리 ‘강제 소개’의 전문가가 되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한 치의 의심도, 주저함도 없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토록 높은 자리에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어떻게 하면 유대인을 더욱 ‘잘’ 학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골몰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의구심을 내려놓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불편함으로부터 기꺼이 도망쳤기 때문이다. 권력과 권위 앞에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순순히 복종했기 때문이다.
머지 않아 내란범들이 각자 합당한 죗값을 치르게 되는 시기가 오면, 시민들은 곳곳에 둘러앉아 이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떤 곳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교육자들은 광장에서 보여준 민주시민의 역량이 어떻게 교실에서의 다양한 활동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지, 광장을 밝힌 응원봉들이 어떻게 교실 안을 비출 수 있게 될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때 나는 국회의사당에 무장을 하고 뛰어 들었던 젊은 군인들의 흔들리는 눈빛들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용기있게 흔들리고 주저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어떤 생각과 태도가 요구되는지, 그것들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는 교실 속 구성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 나는 그것이 이 땅의 역사에서 길어올린 민주시민교육의 중요한 교육 내용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