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김채원의 몽민화: 잃어버린 꿈을 그리는 민화의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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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김채원의 몽민화: 잃어버린 꿈을 그리는 민화의 제3시대
404. 김채원의 몽민화(夢民畵)
  • 입력 : 2024. 07.18(목) 17:52
김채원 작, 꿈의 정원Ⅱ, 46×36cm, 견본채색, 2023
김채원 작, 비밀의 숲, 29×43cm, 견본채색, 2021
김채원 작, 긴꼬리제비나비, 28×28cm, 견본채색 지직화, 2023
마당에 작은 연못을 두고 붓꽃이며 창포며 산나리꽃이며 원추리 따위를 심었다. 사월의 철쭉을 지나 오월엔 창포와 붓꽃, 유월엔 원추리, 칠월엔 산나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 작은 연못의 물비늘을 벗한다. 붓꽃과 창포는 너무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힘들다. 꽃이 피기 전 봉오리를 맺은 모습이 마치 붓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 붓꽃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꽃들이 모두 수려하니 으뜸이 따로 있겠는가만 붓꽃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아마도 연한 자주색을 탐하는 심미안의 발현이리라. 붓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도구라는 점을 인유(引喩)한 감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날아드는 나비들은 마치 한 폭의 초충화(草蟲畵)를 연출한다. 꽃이 있으면 나비가 날아드는 게 음양의 이치다. 벌과 나비가 없으면 어찌 꽃을 피우겠으며 꽃이 없으면 또 어찌 벌과 나비가 존재하겠는가. 그래서 신사임당은 하찮은 풀과 꽃들을 그려 조선 초기 여인네들의 정조(情操)를 발설했을까? 신사임당 외에도 조선 후기의 심사정(沈師正)이 이런 세계를 잘 그렸고, 조선말의 남계우(南啓宇, 1811~1888))는 특히 나비를 잘 그린다 해서 남호접(南胡蝶)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계우의 별칭처럼 이들의 세계관은 음으로 양으로 확장되고 수렴된다. 동양으로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 이르고 서양으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무지개 여신 이리스(Iris)에 이른다. 이리스에서 비롯된 꽃 이름 아이리스는 비 내린 뒤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새와 벌과 나비들이 공중을 날아 하늘의 뜻을 전달하기에, 이에 기대 꿈과 소망을 다시 하늘에 전달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미술사를 대입할 필요조차 없다.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며 꿈과 이상세계를 선물했던 창조의 산물, 인류 기원의 신화와 꿈의 세계로 거슬러 오르는 세계의 현현이다.



민화 작가 김채원의 그림 세계



조선말 남계우의 후세들이랄까, 민화(民畵)계에도 나비를 그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비에 투영한 인류의 오래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아니, 개체 수가 턱없이 줄어든 나비를 꽃과 나무와 숲과 함께 감상하는 풍경이 희소해진 까닭일 수도 있다. 기후위기 때문일 것인데,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나비와 꽃과 나무와 숲을 그리는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부여잡아 선물해주는 여신 ‘이리스’들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민화 작가 김채원을 만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오래된 선망(羨望)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의 민화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녀가 유별나게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나무와 풀과 숲과 포개진 잎들을 그렸을 뿐이다. 그 위에 몇 마리의 나비들이 날고 때때로 새들이 난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끝도 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경험과 마주하게 된다. 왜 나비를 즐겨 그리는가 하고 김채원에게 물었다. 망설임 없이 가족 얘기가 돌아온다. 엄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비? 그건 내 영혼이야, 내가 죽은 다음에 날아가는 것 같아. 아빠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하늘을 유영하는 메신저야. 아마도 봄날이었던 것 같은데, 할머니 산소에 가면 나비가 날아오른다. 그때마다 반가워하며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다. 어머! 할머니가 오셨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 나비로 환생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유년 시절에 가졌을 법한 신화적 감성이다. 누에고치 같은 애벌레를 그려두고 ‘사춘기’라고 이름을 붙이거나 나비들이 떼 지어 날아가는 형상을 그려두고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주지하듯이 우화등선은 ≪진서(晉書)≫의 <허매전(許邁傳)>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는 고사다. 알에서 유충으로 다시 번데기에서 성충의 단계로 마무리되는 주기를 사람에게 비유한 것이다. 그녀가 떠올리는 또 한편의 나비는, 잔잔한 인생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나 영화의 엔딩 장면이다. 자막이 오르기 전 또는 나레이션과 함께 간혹 나비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마치 나인 듯 너인 듯 혹은 그 누구인 듯, 스스로 나비가 되어 결말 이후를 암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화상을 그려두고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 이름 붙이고, 아빠의 초상화를 그려두고는 아빠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이야기한다거나, 나비 앉은 모자를 쓴 엄마의 초상을 그려두고는 육체를 벗은 자유로운 영혼을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러하다. 몽환적이지만 그 깊이를 측정하기 어려운 본원적 노스텔지어다. 예컨대 작품 ‘비밀의 숲’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깊이의 비밀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여신 이리스가 유영하는 하늘, 무수한 별들이 이어지는 은하수와 수천 색의 무지개와 혹은 그 끝을 가늠할 길 없는 숲과 그 안의 보이지 않는 요정들이 무시로 시선을 끌어당긴다. 이름 그대로 비밀의 숲이다. 그 비밀은 김채원만의 것이 아니다. 감상자들 누구나 자신의 비밀을 투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이름도 빛도 크게 없는 작가이지만 내가 김채원을 주목하는 것은, 여린 붓꽃의 눈으로, 그 심미안으로 숲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그 안과 밖의 나비를, 아니 사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그리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의 작품에 몽민화(夢民畵) 곧 우리들의 꿈을 그리는 민화라는 이름을 붙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한 부류의 민화 그리기를 넘어, 인류가 잃어버린 꿈을 회복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장자의 신화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남도인문학팁

지직화(紙織畵)에서 몽민화(夢民畵)까지, 민화의 제3시대

김채원의 몽민화(夢民畵)는 지직화(紙織畵) 기법에서 비롯된다. 지직화란 명칭은 국어사전에 나와 있지 않다. 그만큼 생소한 용어다. 하지만 우리네 전통적인 방식이자 장르 중 하나다. 그려둔 그림을 씨실 삼아 아주 미세한 넓이 예컨대 2mm로 자르고 똑같은 크기의 용지를 날실 삼아 잘라서 마치 베를 짜듯 엮은 그림을 말한다. 이같은 공예기법은 담묵(淡墨)이나 석채(石彩) 따위의 평면적 그림으로 소화할 수 없는 몽환적 효과를 지어내기 위해 고안된 아주 오래된 방식이다. 지직화 연구의 첫 논문이랄 수 있는 김수연의 「회화와 직조의 결합, 紙織畵 연구」(미술사학연구 306호, 2020)에 의하면, 중국의 복건성 영춘에서 처음으로 제작되어 조선과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조선 말기에 붓으로 그리는 일반 회화에 그치지 않고 미술문화가 다양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김채원은 이 전통에 기반하여 배채법(背彩法, 종이의 뒷면에 색을 칠하여 은은한 느낌이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화법)을 가미하였고, 더하여 비단에 그린 그림 몇 장을 겹쳐 표구하는 방식으로 독특한 민화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나아가 지직화의 기법을 원용해 다양한 작품을 생산하고 있다. 몽민화의 세계는 철학적으로 말하면 장자의 호접몽으로 거슬러 오르고, 기법으로 말하면 우리네 전통의 지직화에 거슬러 오른다. 안팎으로 전통을 재창조하여 열어젖힌 이 세계관과 기법들을 통칭하여 명실상부한 민화의 제3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내가 정리하고 있는 민화의 시대 구분은 이렇다. 제1시대는 소박한 민화 곧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정의했던 시기다. 제2시대는 조자용이 정의했던 시기다. 궁중화를 포함하여 민족적 이미저리를 광범위하게 포획했다. 지금 우리 민화가 서 있는 지점이다. 제3시대는 비로소 창작에 이른 시기다. 동서양 장르 포섭의 경계를 넘어, 특정 전문가가 아닌 민간인들이 중심이 되는 창조주권의 시대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내면서도 지극히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거장, 곧 탁월한 보편의 아름다움을 발설하는 이들이 몰려온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적하는 나의 노정에 김채원이 한편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