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장악청의 후예들이 연행한 1980년대 진도씻김굿. 김희태 제공 |
193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진도신청, 나아가 우리나라 신청에 대한 내력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 내용은 ‘젠쇼에이스케(善生永助, 『朝鮮の 聚落』 中篇. 308~309쪽. 조선총독부. 1933’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 성내리 일부 무녀와 관노부락에 20호 62명이 있다. 무녀와 관노 등은 장악청을 중심으로 모여 산다. 일정한 생업이 없이 남자는 노래와 연주를 담당하고, 여자는 무업에 종사하고 있다. 생계가 곤란한 상태이다. 언어와 예의는 모두 천민이며 일반 주민과 사교가 없다. 대체로 계급 제도의 타파와 경제조직의 변화가 영향을 받고 있는데, 특별한 것은 교통기관의 발달로 종래 특수 부락이 전업하거나 이산 등을 거치면서 점차 집단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또 계급적 차별 관념이 점차 희박해 지고 있다. 따라서 일시 치열했던 옛 백정 계급이 형평운동 같은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들어져 살고 있다. 대체로 특수 부락과 보통 부락 간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점차 감소해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용은 동아일보 기사와 비슷하다.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무당에 대한 전국 조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정보들을 토대로 2018년 1월 26일 박덕인과 남도 음악이라는 글을 본 지면에 썼다. 또 지난 2019년 5월 30일에는 여수 영당과 신청에 대해 소개해 두었으며 2020년 5월 28일 칼럼을 통해 보다 상세하게 다룬 바 있다. 좀 더 세부적인 정보가 필요한 분들은 그 글을 찾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이 논의를 다시 펼쳐두는 이유는 근자에 진도학회(회장 이윤선) 주관으로 열린 ‘탁월한 보편, 진도 관마청과 신청으로부터’라는 제목의 학술포럼에서 목포대 송기태 교수와 나주시립국악원 윤종호 감독의 발표가 각별하였기 때문이다. 기왕의 내 논의를 보강하고, 신청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를 해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컨대 전국에서 최초로 나주신청을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나주지역 모 기자 등 여러 층위의 사람들에 의해 복원사업 자체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무당들의 집단이었던 신청을 왜 복원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결국 ‘나주신청’이라는 타이틀을 걸지 못하고 ‘나주신청문화원’으로 변경하여 개소하게 된 일화가 있다. 신청의 기능과 문화적 함의를 무당이라는 종교적 집단으로 한정하여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신청을 단순히 무당들의 집단이라고 폄하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당들의 집단을 국가와 지자체가 협업하여 복원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시각도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국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공연하거나 연행하는 상당 부분의 것들이 이 신청 조직에 토대하고 있는데 말이다. 지금은 국가유산이라 호명되는 옛 무형문화재들의 팔 할이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 길게 인용해둔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못 먹고 못 입고 천대받으며 지켜온 이네들의 예술이 오늘날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창대하게 확산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로 조상들 이름과 내력을 적은 선생안을 불태우는 일이 많았는데 이 또한 사회사적 맥락에서 분석해볼 여지가 많다. 기생제도나 노비제도 철폐와 맥을 같이 하는 일종의 신분제도 변혁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면 때문에 많은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신청 조직과 무계 집단의 헌신과 노력이 오늘날 국악, 나아가 K-컬처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는 변했고 제도는 혁파되었으며 가장 낮은 곳에서 땀 흘려 일하며 수고하던 이들이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지 오래이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고 역사의 방향이며 인류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천민집단이었던 무당들을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국가법률을 통해 보호하고 장려하며 그 뜻을 기릴 수 있었겠나. 개땅쇠 출신 촌부들이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의 총수가 되며 김대중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나. 한낱 기방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이들이 K-컬쳐를 선도하는 인간문화재가 되고 세계만방에 한국음악의 결 고운 아름다움을 선보일 수 있었겠나. 헐벗고 굶주리며 이 땅을 지키고 문화를 고수해온 이들이 이 시대의 주역들이며 미래를 열었던 장본인들이다. 전국 각지에 산재했던 천민집단 신청의 조직원들이 바로 그 주역의 하나였던 것이다. 신청이라는 조직을 상고함에 이러한 맥락이 좀 더 진중하게 고려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남도인문학 팁
진도 장악청은 전통음악 종합대학이었다.
신청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꾸려진 무속인들의 연합체를 말한다. 전국에서 부르는 이름이 서로 다른데 진도는 이를 장악청이라 했다. 이 장악청의 기운이 오늘날 국립남도국악원으로 이어졌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같은 역사적 사실이나 유물이라도 해석하는 시선이 다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같은 값이면 해석의 방향을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쪽에 둔다는 점이다. 근거를 조작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 거짓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박황이 펴낸 ??판소리 이백년사??(1987)에 보면, 신청을 이렇게 설명해두었다. “신청은 조선 후기 국가 관할에 의해 무인들에 의해 조직된 예능 집단을 말한다. 이들 예능인들의 관허의 무계를 조직한 무단의 본부와 기관을 전라도에서는 ‘신청’이라 하고 경기도와 이북지방에서는 ‘재인청’이라 하였다. 이 신청은 전라도 각 고을마다 있었으며 전주, 남원, 광주, 나주, 장흥의 신청이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신청의 장을 대방(大房)이라 하고 대방 아래 도산주 2명을 두었으며, 그 밑에 집강 4명, 공원 4명, 장무 2명을 두었다.” 여기서 각종 의례와 연희, 교육 등이 이루어졌다. 대개 무당들의 사적 조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술인총연합회(예총)’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사설 국악교육기관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종합대학교였을 수 있다. 이번 발표에서 목포대 송기태 교수는 진도의 장악청을 ‘신청 예인들의 경계를 넘는 예술교류와 공적 네트워크’라고 하였다. 송교수는 이 분석을 위해 1700년도부터 기록된 방대한 진도읍 동외리 동계 문서를 살폈다. 300여 년이 넘는 이 문서에서 확인한 것은 민간 예술활동의 탁월함과 그 역량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국립남도국악원과 진도군립예술단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어찌 진도만의 역량이겠는가. 장차 경기 재인청, 나주 신청, 진도 장악청을 비롯해, 전국에 산재해있던 신청의 면모와 기능, 그 사회적 네트워크와 역량을 재인식하고 이른바 K-컬쳐의 자산으로 활용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