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호 교사 |
어? 내가 어떻게 가곡을 부르고 있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서림초등학교 6학년15반 김맹섭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곡입니다. 음악을 사랑하셨던 선생님은 풍금을 반주하시며 지겹도록 반복해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싫었는데, 지금 50대가 되니 “아, 선생님의 선물이었구나” 하게 됩니다. 커다란 하얀 꽃잎의 목련 나무만 보면 저절로 나오는 노래, 몸으로 체화된 경험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죠.
한병철이란 철학자는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고 했습니다. “너는 할 수 있어”라는 긍정성이 특징입니다. 과거와 달리 훈육을 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성과’를 최대한 낼 수 있도록 하는 사회라는 것이죠. 누군가 감시(파놉티콘)도 이제 필요 없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송강호의 대사처럼 지금 젊은 세대들은 ‘계획’들을 스스로 세웁니다. 프로젝트를 시행하지요. 그래서 스스로 예속된 사람(Sub-ject)이 됩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등을 채찍질하는 노예가 됩니다.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가 최대한의 생산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감시-통제보다 구성원들이 자유스럽다고 느끼며 자기를 전시하고, 과잉 소통을 하는 것이 이윤을 얻는데 더 유리하다는 것이죠. 사회구성원들이 스마트폰을 마치 성스러운 묵주처럼 지니고 다니며 어떤 부정적인 것도 경험하지 않는 자기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우울해하는 사회라는 것이죠.
디지털 사회에서 소통은 과잉입니다. 카톡 단톡방을 한번 보세요.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네요. 어린이들도 카톡, 인스타, 밴드. 과거와는 비견할 수 없는 ‘소통’과잉 속에 있습니다. 피로사회는 체험도 과잉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체험’들을 가상공간은 제공합니다. VR을 착용하면, 우주선도 타고, 뉴욕 거리를 걷기도 하며,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경험’이 될 수 있을까요? 체험은 즉각적이며 일시적인 것입니다. 시간의 지속을 견디며 뭔가를 겪는 ‘경험’과는 차이가 있지요.
자기 감옥 속에서 우울증으로 소진해가는 ‘피로사회’에서 학교라는 공간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소중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아무런 제약도 없는 매끄러운 디지털 공간에서 ‘과잉’소통하여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어린이들은 학교에 오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마음에 안들면, 바로 단톡방을 나오거나, 차단시키는 공간과는 달리 껄끄럽고, 당황스럽고, 짜증나는 상황들을 계속 마주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바로 피로사회에서 사라진 “부정성”의 경험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를 대면해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나를 늘 돌봐주고 나만을 바라보며, 좋은 것만 해주는 부모 혹은 스마트세상과 달리, 스무명 넘는 어린이들과 생활하기 위해 규칙을 강요하는 선생님의 말을 들어야만 합니다. ‘야단’을 치는 부정적 피드백을 받아야 합니다. 국경을 넘고, 우주를 넘어 마음껏 비상하는 디지털 공간과 달리, 좁은 교실에서 작은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이동할 때는 안전을 위해 줄을 서야만 한다고 하고, 급식을 할 때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질서를 지키며 식사를 해야 합니다.
역설적인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피로사회에서 학교가 제공하는 안식이자 피정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 외에 자기라는 ‘감옥’(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타자’를 만나 껄끄럽고 힘들고, 그래서 진실한 ‘사랑’(에로스)을 ‘경험’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 있을까요?
학교는 이 ‘피로사회’, ‘성과사회’에서 선물 같은 공간입니다. 물론 교사도, 어린이도 투명사회 속에서 번아웃된 상태로 만남이 이뤄지고 생활 합니다. 그래서 더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학교는 하얀 목련꽃 그늘아래의 정서를 지켜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