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에...밟느냐 건너냐...참혹한 믿음의 감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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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에...밟느냐 건너냐...참혹한 믿음의 감별
힐링로드
후미에와 운젠지옥
기리시탄 아니라면 밟아라
예수, 성모마리아 부조
박해와 순교, 배교 상징물

운젠지옥에 끌려간 340명
펄펄 끓는 물, 끝없는 고문
밟을 수밖에 없었던 신자들
발을 씻은 뒤 그 물 마시고
채찍으로 제 몸 때리며 회개

순교 기리는 운젠성당
온천엔 십자가와 火炎 비석
  • 입력 : 2016. 10.26(수) 00:00
일본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고안된 후미에. 놋쇠에 예수와 성모상이 조각된 것으로 매년 정월 초 백성들은 후미에를 밟아 자신이 기리시탄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신자들은 끝내 밟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사진은 나가사키 26성인순교기념관 내 후미에 복제품. 진품은 국립 됴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낯선 그림판이 보인다. 나가사키 26성인순교기념관 1층 전시실에 보관돼 있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다. 놋쇠로 만든 판 위에 예수나, 성모마리아가 부조로 새겨있다. 놋쇠그림을 나무판에 끼워놓은 것도 있다. 후미에(踏み繪)-. 앞으로 나아가다는 단어의 접두사인 '후미'와 그림이라는 '에'로 구성돼있다. '그림 위를 걷는다'는 뜻이다. 에후미(踏繪み)라고도 한다. 일본 기독교 역사에만 등장하는 박해와 순교, 배교의 상징물이다.

1620년 후반, 정월 4일부터 9일까지 나가사키시 중심부 백성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관청에 집결했다. 그리고서 후미에를 밟아야 했다. 불교도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밟고 지나갔다. 기리시탄(일본의 천주교 신자)은 그럴 수 없었다. 이틀 후인 12일부터 17일까지 나가사키의 다른 마을과 우라카미 야마자토, 후치마을 순서로 진행됐다. 환자나 갓난아이도 빠질 수 없었다. 기생들이 집단 거주했던 마루야마 지역의 후미에는 때아닌 구경거리로 등장했다. 분 치장에 요란한 기모노를 입은 기생들의 퍼레이드를 보려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밟고 지나갈 것인가, 건너 뛸 것인가. 매년 정월이 오면 나가사키 신자들은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다. 신심이 가득했던 그들은 끝내….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패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이어 1596년 스페인 선박이 태풍으로 일본에 표류하게 되는데, 그 때 선원으로 부터 뜨금한 얘기를 듣는다. "스페인은 세계 강국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현지인을 개종시키고 점령하려 합니다." 격분한 히데요시는 선박에 있던 선교사를 포함해 모두 26명을 1597년 2월5일 처형한다. 일본의 첫 순교인 26성인순교자들이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았다. 그는 1612년 직할지에 이어 1614년 전국적으로 금교령을 선포했다. 이제 일본 땅에서 예수와 성모, 천주교, 크리스천, 기리시탄은 사라지게 됐다. 도쿠가와 막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천주교의 씨를 말렸다. 모든 주민들을 절에 등록하게 하고, 그 절의 신자라는 증명서를 받도록 의무화했다. 사청(寺請)제도였다. 그것도 모자라 매년 종파를 조사하는 종문인별개(宗門人別改)도 들여왔다. 절들은 현상금을 내걸고 기리시탄의 행적을 찾았다. 각 사찰들은 '수상한 자가 있다면 신고하라. 그 포상으로 사제를 신고한 자에게는 은 오백냥, 신자를 신고한 자에게는 은 삼백냥, 배교하였다가 다시 천주교를 믿는 자를 신고한 자에게는 은 삼백냥, 사제나 수도자를 숨겨주며 같이 지내는 사람이나 천주교 신자를 신고한 자에게는 은 백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857년 2월 센푸쿠사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후미에, 그 처연한 예수상은 1628년 도입됐다. 나가사키의 관리 미즈노 카와치노카미가 고안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신앙을 버리는 배교의 의식으로 후미에를 밟았지만, 1631년 운젠에서 기리시탄 감별법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나가사카 교회군 순례기'의 저자 박정배씨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관청에서 후미에를 밟고 집으로 돌아와 용서를 빌었다. 어떤 이들은 오텐벤샤(회초리)라는 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후미에 제도는 일본 땅에 신앙이 허용된 1873년까지 245년간 지속됐다. 진품 목판 후미에는 10개가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목판본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압수해 복제한 것들이다. 놋쇠 후미에는 나가사키 관리의 명령에 따라 주물공인 하기와라 유스케가 만든 것으로 19개가 현존한다.

끝내 후미에를 밟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나가사키에서 자동차로 1시50여분 거리인 운젠시로 향한다. 나가사키현의 동쪽 시마바라 반도의 화산 운젠다케(1480m)를 중심으로 형성된 온천 지역이다. 운젠은 일본 국립공원 1호로 전남 구례군과 자매결연 도시이기도 하다. 짙은 유황 내음과 지상으로 솟구치는 온천 증기가 분화할 것만 같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펄펄 끓는 온천을 두고 운젠지옥이라 한다. 온천온도는 98도, 증기는 최고 120도까지 올라간다.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말 그대로 지옥 일게다.

1627년과 1632년 등 5년 동안 340명이 이 산속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기리시탄이었다. 나가사키 등지에서 온 신자들은 운젠지옥에서 끝없는 고문에 몸서리쳤다. 고문은 죽이려는 행위가 아니었다. 고통을 반복해 가함으로써 배교를 요구했다. 신앙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온천수를 악용했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집어넣었다가 다시 빼내는 행위를 반복했다. 등에 상처를 내 온천에 들이밀기도 했다. 의사를 둬 적당히 치료하면서 고문은 계속됐다. 부모 앞에서 아이를 온천물에 던졌다. 고문이 끝나면 뜨거운 분화의 열기가 통하는 작은 방에 밀어 넣었다. 신자들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올라쇼(주기도문)과 찬송가를 불렀다.

운젠지옥 너머 숲 속에 십자가가 보인다. 온천의 증기로 보였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십자기 옆에 숨진 신자들을 위로하는 작은 돌 비석이 서 있다. '火炎'(화염)이란 비문이 애처롭다. 온천 고문에 이어 불태워졌을까.

운젠을 나와 다시 나가사키로 향한다. 온천지구에서 10여분 달리니, 왼편에 성당이 보인다. 해발 800m에 선 운젠성당이다. 운젠 지역에서 숨진 이들을 기리는 성당이다. 주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문이 잠겨 있다. "성당에 오셨습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성당 관리인이란다. "매주 미사가 열리나요." "마을 전체 신자는 10명인데, 5명 정도가 모여 미사를 드리지요."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가 독특하다. 서양식이 아니라 모두 일본풍이다.



기리시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후미에를 밟고 돌아 온 날 가죽 채찍으로 제 몸을 때리며 회개했다. 또 예수판을 밟은 발을 씻은 뒤 그 물을 마시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끝내 후미에를 밟지 못한 이들은 죽음의 목전까지 고문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후미에를 다룬 소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만나러 간다. 저 멀리 운젠성당에서 손을 흔든다. 멀리 떠나는 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듯하다. 시원한 박하사탕 마냥 가슴이 시원하다. 영혼의 힐링이듯이.

나가사키현 운젠에서
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

gslee@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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