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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허경의 사진으로 보는 미술이야기> 예술가의 불심과 시대적 갈등,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예술 의지를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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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허경의 사진으로 보는 미술이야기> 예술가의 불심과 시대적 갈등,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예술 의지를 전달

광주 원효사와 오지호 가(家)의 탱화

게재 2022-05-15 14:04:48
오지호, 아미타후불탱화, 1954, 천에 채색, 152x198cm (1)
오지호, 아미타후불탱화, 1954, 천에 채색, 152x198cm (1)

광주 도심에서 무등산을 향하여 옛길 위를 걷다 제2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면 천년고찰 원효사(元曉寺)의 고즈넉한 전경이 펼쳐진다.

무등산 중턱에 자리한 원효사(元曉寺)는 다른 사찰과 달리 '원효암중건기(元曉庵重建記)'(1847)와 '원효암중수상량문(元曉庵重修上樑文)'(1894)에 창건내용이 남아 있을 만큼 정확한 문헌 기록을 가진 산사(山寺)이다. 사찰의 명칭은 6세기 초중반, 원효대사가 무등산 북쪽 산자수려(山紫水麗)한 계곡에 머물러 암자를 개축하면서 불리게 되었다. 원효사에 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은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1926)에서도 확인된다. 최남선은 1925년 50여 일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순례하고 기행문을 집필했는데 원효사에 관해 "법당(法堂)과 범절(凡節)이 당당한 사찰의 풍모를 갖추었다. 본존인 석가여래상이 거룩하시고 사자의 등에 지운 대법고(大法鼓)는 다른 데서는 못 보던 것이다"라고 세세히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수백 년을 일구었던 가람(伽藍)은 안타깝게도 한국전쟁기에 화염에 전소되고 만다.

1954년 주지 인곡(麟谷)스님과 신도들은 곧바로 불사중건에 착수하였고 한국 사찰의 전례에 따라 대웅전에 불상(佛像)과 그 후면에 탱화를 봉안하게 된다. 그런데 법당 뒷면 벽에는 특이하게도 서양화가 오지호 화백이 그린 '아미타후불탱화(阿彌陀後佛幀畵)'가 걸리게 된다. 오지호는 중앙의 연꽃 대좌 위에 아미타불을 앉히고, 그 좌우에 육대 보살과 여섯 제자를 배치한 불교회화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어 '12 보살상'을 제작하였고 이는 불상을 모신 상단(上壇) 뒤에 걸어 두기 때문에 '후불탱화(後佛幀畵)'라 지칭되었다. 일반적으로 '후불탱화'는 우주의 진리, 깨달음의 경지,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만다라'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오지호는 어떻게 불화(佛畫)의 유형인 탱화를 그리게 되었을까. 탱화 제작은 오지호가 한국전쟁기의 공백을 깨고 지산동 초가집에 정착한 후 다시 붓을 들기 시작한 연유에 기인한다. 오지호는 한국전쟁 중 '전남지구 총사령부' 출판부원으로 입산 활동을 하다 군경토벌대에 검거되어 옥고 가운데 가까스로 지역민의 탄원과 처가의 구명으로 풀려난 사건과 연관성을 갖는다. 6·25의 비극은 오지호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척박한 시대의 상처와 멍에를 짊어지게 했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원효사 중창 불사에 지역 신도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는데, 가장 대표적인 분이 지응현(池應鉉)씨와 그의 부인이다. 그리고 지응현 씨의 사위가 바로 오지호 화백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오지호의 장모 김계(金桂)는 오래전부터 원효사에 다니던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원효사 중창 불사 때 사위인 오지호에게 탱화를 그려 달라고 권유한 것이다.

'아미타후불탱화'는 2002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아름다움과 깨달음-한국 근현대미술에 나타난 불교사상'에 불교미술로서 처음 공개되어 주목을 받았다.

현재 '아미타후불탱화'는 원효사 본사인 송광사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이관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수장고 안에서 마주한 탱화는 명주 베 바탕에 식물성 특수 안료, 아교를 배합한 물감과 치밀한 구도, 오방색의 채색 감각이 더해져 강렬한 색채를 뿜어낸다. 무엇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자세, 가느다란 눈썹과 엄정한 표정,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표현한 능숙한 필선은 명암법을 사용하지 않아 평면적임에도 불구하고 석굴암 본존불이 연상될 만큼 생생하다.

오지호는 유화를 다룬 화가지만 1930년대부터 한국 고유의 색채를 탐구했기 때문에 불교회화의 강렬한 색조와 단순미를 포착할 수 있었다. 오지호가 '아미타후불탱화'를 제작할 즈음 그린 '가을'(1953), '초동'(1954)에서 파란 하늘, 붉은색의 산, 노란색의 단풍, 간간이 보이는 흰색 지붕, 초록색의 채소밭 등 윤곽선으로 형태를 표현하거나 오방색을 간결하게 구사하는 변화를 보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오승우, 칠성탱화, 1955, 205.1x121.7cm (4)
오승우, 칠성탱화, 1955, 205.1x121.7cm (4)

이러한 원효사와의 인연은 이듬해 그의 아들인 오승우에게 이어졌다. 오승우는 1955년 외할머니 권유로 '신중탱화(神衆幀畵)'와 '칠성탱화(七星幀畵)'를 그려 봉안하게 된 것이다. 대체로 탱화는 사찰의 전각이나 불상의 종류에 따라 달리 걸게 되는데, 크게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로 나누어진다. 오지호가 그린 후불탱화가 본존불의 신앙적 성격을 묘사한 것이라면 '신중탱화'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띤다. 여기서 '신중탱화'의 경우 칠성신을 신중의 하나로 보고 신중탱화 속에서만 묘사하였으나 조선 초기 칠성에 대한 신앙적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신중탱화에서 분화된 별개의 칠성탱화를 그리게 된다.

오승우는 전통오방색의 범주 속에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인물들을 자유롭게 배치하여 구도의 변화뿐 아니라 신광(身光)과 보살들의 두광, 머리의 화관을 각기 다른 색으로 채색함으로써 현대적인 감각을 표출하였다.

1950년대 중반 오지호 가에 의해 제작된 탱화는 일반 대중에게 불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할 뿐 아니라 불교를 장엄(莊嚴)하기 위한 종교미술의 기능을 한다. 누구든지 간절히 염원하면 괴로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지호 가의 탱화는 예술가의 불심과 시대적 갈등,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예술 의지를 전달한다.

김허경은 한국프랑스문화학회 ‧ 동아시아문물연구소 ‧ 한국미술평론가협회 ‧ 한국큐레이터협회의 위원이며 한국근현대미술사, 동서양미술론, 미술 아카이브, 문화예술정책 등 전문 분야와 연계한 학술연구, 전시기획 및 미술비평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