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문(門)! 나오미의 ‘궤적’을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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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문(門)! 나오미의 ‘궤적’을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다
414. 포월(匍越)의 직조(織造), 나오미의 그림 세계
  • 입력 : 2024. 09.26(목) 17:14
나오미 작, 바다의 가장자리로부터 중에서 1.
나오미 작, 바다의 가장자리로부터 중에서 2.
“낱낱의 기어감이 양적으로 쌓이고 쌓일 필요가 없다. 그것들이 기계적 운동의 차원에서 연속적으로 나열됨으로써 비로소 지나감과 넘어감이 생성하는 게 아닐 터이다. 포월을 통해 종래의 운동 개념이 바뀜으로써 역시 바뀌고 부서지는 것이 시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포월의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시간이 생성한다. 이 새로운 시간 속에서는 하나하나의 기어감이 이미 지나감이며 동시에 넘어감이다. 나름대로 이미 일종의 지나감과 넘어감을 견딘다. 하나의 개별성은 매우 느리고도 동시에 빠르다. 거의 제자리에서 머무는 듯하지만, 매우 멀리 간 것과 같고, 너무 느리지만 너무 빠른 것과 같고, 너무 작지만 너무 큰 것과 같고, 너무 얕지만 깊다. 하나의 조그만 개별성이 너끈히 열린 전체로 생성한다. 생성하는 전체는 너끈히 하나하나의 사소한 기어감으로 일어난다.” 김진석이 쓴 ‘초월에서 포월로(솔, 1994)’의 한 대목을 역시 그의 글 ‘포월과 소내의 미학’(문학과지성사, 2006)에서 각주로 인용하여 둔 글이다. 다소 어려운 개념들, 포월(匍越)이 등장하고 쌍둥이 개념처럼 소내(疏內)가 등장한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용어들이다. 토끼는 거북이를 추월하지 못하고, 다만 기어가는데, 어느새, 넘어간다고 했다. 소내(疏內)는 포월과 마찬가지 어법으로 소외(疎外)에서 끄집어낸 용어다.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따돌리거나 멀리하는 게 아니라, 외려 소외 안으로 포섭하는 형국이랄까. 미학적 형식을 철학적 개념과 섞이게 하려고 김진석이 창안한 용어다. 이에 견주어 <도덕경> 22장, “멀리 돌았기에 온전하고 굽었기에 곧다(曲則全, 枉則直)”를 떠올리는 이유가 있다. 낱개들의 파노라마, 아니 임동확의 시처럼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병풍 형식의 시리즈로 독자들을 혹하게 한 나오미의 그림 얘기다.



나오미의 작품, <바리데기>에서 <파시(波市)>까지



수년 전 무안군 소재 <오승우미술관>에서 나오미의 작품을 전시했었다는데, 코앞에 있으면서도 눈여겨보지 못했다. 올해 초 미국 민화 특강을 준비하며 <바리데기>(2015) 시리즈를 접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바리데기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심청이나 바리데기 설화가 왜 죽은 자와 관계된 굿과 예술로 드러나는가에 대해서는 졸저 ‘산 자와 죽은 자의 축제(민속원)’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고전 설화 심청전과 다시래기의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오미의 시리즈 작품 제목은 “물구경 꽃구경”이다. ‘눈물 하나가 바다를 일으킨다(5폭 병풍)’ 작품은 전형적인 십장생도 혹은 연꽃과 괴석도(怪石圖)지만, 군데군데 낯선 이미지들을 숨겨두었다. 마치 책가도의 어떤 부분들을 해체하거나 해부해놓은 것처럼.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울고 있는 캐릭터, 르네상스 시기의 표상일 듯한 얼굴 조각, 어쩌면 금궤일지도 모를 검은 궤짝, 숨어있는 물고기의 비늘들, 전체를 관통하는 괴석과 파도의 교섭과 교란,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스며든 이 이미지들 속에서 내가 찾아낸 것은 문(門)이었다. 곳곳에 숨겨진 문짝이 아마도 이 그림의 키워드 같다는 생각 말이다. 정병모에 의하면 모란 그림이건 십장생 그림이건 대부분의 괴석도에는 동굴 같은 구멍이 있다. 이 동굴을 통해서 이승과 저승, 이것과 저것, 안과 밖이 소통하는 일종의 도교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아니나 다를까 ‘물구경 꽃구경’에는 감추어진 새의 날개, 파도로 변한 구름, 금동 사자, 해체된 책가도의 중심에 문짝이 설정되어 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괴석도의 동굴 같은 것이다.

또 하나 주목했던 것이 근작 시리즈 “파시(波市)”이다. 전작 바리데기에 못지않게 내가 당황했던 것은 파시의 해부였다. 주지하듯이 파시는 고기가 한창 잡힐 때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을 말한다. 황해도 연평의 조기 파시, 전북 위도의 조기 파시, 거문도 및 청산도의 고등어 파시 따위가 그것이다. 파시의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풍요와 풍어, 근대와 재화 따위에 복속되어 있다. 하지만 나오미의 그림은 기괴하다고 할 만큼 파시를 해부해 버린다. 거듭하여 전시가 열렸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24. 4. 23~8. 4)에서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전시 설명의 일부다. “작가는 서남해의 어촌 마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 신앙과 영감놀이와 같은 토착 행사가 전승되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작가는 조선 시대 불화의 한 형식인 감로탱과 게발도 등을 참조하여 현실 속 믿음의 행위와 초현실적 이미지가 교묘하게 결합된 하나의 군선도(群仙圖)를 만들어 냅니다. 제주도에서 안전한 조업과 풍어를 기원해주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과 서남해 어촌에서 주로 믿던 도깨비, 중화권에서 바다의 신으로 섬기는 ‘마조’, 고대 일본에서 풍작과 역병을 예언했던 요괴 ‘아마비에’ 등 초월적 존재들이 소환된 파시의 풍경은 낮과 밤, 축제와 전쟁,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모호하게 공존하는 마술적 공간을 제시하면서, 사라져 가는 수많은 것들을 상기시킵니다.” 부분과 낱개들의 교란과 소용돌이의 이면을 일부러 회피한 설명 같다. 그래서 또 이렇게 설명한다. “끊임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겪는 불안과 고립에 주목, 무속, 신화, 설화의 초월적이며 지혜로운 존재들을 통해 서로의 소통과 공생을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전시”라고. 전작 바리데기보다는 민화풍 배경이나 컨셉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최근 9월 25일까지 진행했던 인천 문화양조장의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전시는 옴니버스식 병풍 시리즈에서 주제 중심 컨셉으로 바뀌었다. 낱개와 부분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낸 셈이다. 나는 이 그림들 속에서, 예컨대 빛바랜 심청의 이미지 속에서, 폭파된 듯한 선박의 가장자리에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는 문짝을 여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 문(門)!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의 민화 작가들에게 권하고 싶다. 나오미의 궤적을 주목하라고.



남도인문학팁

시각예술 작가 나오미의 오래된 미래

엄청난 괴력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 나오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민화 기반의 그림을 그리다가 현재는 회화와 설치 작업을 하는 시각예술 작가로 불린다. 비주얼 포토폴리오 BE에서 뽑은 카피처럼 ‘쓸모없음을 쓸모 있게 만드는 사람’일까? 사라져버린 옛것에 주목하여 지금, 오늘, 우리에게 접목한다는 점에서는 동시대성 작가이기도 하다. 정보 수집력과 전방위적인 탐색, 그것을 그림에 얹어내는 실력, 심지어 설치미술과 병행하는 태도들을 보면 고금을 연결하는 다큐멘터리 작가이기도 하다. 2019년부터 시작한 연안해방 시리즈와 계획들을 보면 인천항을 기점으로 중국, 일본, 필리핀, 러시아로 작업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작업의 변화들을 보니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장르의 작가들을 조만간 조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생태의 파괴나 복원, 노스탤지어의 소환 따위로 번역을 시도하는 것은 촌스럽고 번잡스럽다. 다만 발로 뛰어 화면에 펼친 낱개들이 단순한 낱개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낱개의 콘텐츠를 직조하여 화면을 가득 채우고 무속과 신화 속에서 불안과 고립의 출구를 찾는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머지않아 가득 찬 텅 빔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임동확의 시처럼 부분은 전체를 위한 합이 아니다. 부분은 늘 전체보다 크다. 김진석의 화두로 돌아가 말하면 하나의 조그만 개별성이 너끈히 열린 전체를 생성한다. 생성하는 전체는 너끈히 하나하나의 사소한 기어감으로 일어난다. 기어감은 곧 넘어감이다. 나는 그이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두었다. 오래된 미래를 풀어헤쳐 직조하는 포월(匍越)의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