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데스크칼럼>새인물 인재등용의 조건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데스크칼럼
[전남일보] 데스크칼럼>새인물 인재등용의 조건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 입력 : 2023. 08.24(목) 14:30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1926년 6월7일 늦은 오후. 산책 후 성당으로 발길을 돌리던 한 초로의 노인이 길을 건너다 전차에 치이고 말았다. 그는 힘없이 풀잎처럼 쓰러졌다. 행인들은 남루한 행색의 이 남자를 부랑자로 생각하고 외면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한 채 한동안 방치됐다. 택시기사들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변변한 치료조차 못받고 사흘 뒤 숨을 거뒀다. 향년 74세.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
한 천재 건축가는 그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성가족 대성당)’의 완성조차 보지 못한 채.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생활이 곧 건축’이던 그가 남긴 건 낡은 침대 하나 뿐이었다. 당시 신문은 ‘바르셀로나의 성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썼다. 그의 묘는 현재 성가족 대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1882년에 착공된 성가족 대성당은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오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지금도 공사가 진행중이다.

가우디는 1852년 6월25일 대장장이 출신 구리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세울 것도 없었지만 시립 건축전문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대담하고 혁신적인 설계로 과제물 마다 논란을 일으켰다. ‘천재 아니면 미치광이’라는 평가 속에 학업을 마칠 무렵 평생의 후원자를 만난다. 부유한 은행가문 출신의 건축가 구엘 백작이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 본 구엘 백작의 지원 아래 대학건물, 교회, 구엘공원 등 명작들을 쏟아냈다.

세계적인 건축가 였음에도 허름한 외모 탓에 부랑자로 오해를 받으며 삶을 마감한 가우디. 지금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면 도시 전체가 ‘가우디의 건축 백화점’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작품이 즐비하다. 인구 300만명의 도시에 매년 2000만명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가우디의 작품은 지금도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영원한 풍요를 선사하고 있다

#1890년 7월27일 한 화가가 들판에서 권총자살을 시도했다. 총알은 심장을 비켜 갔지만 가슴을 관통한 뒤 척추에 박혔다. 의사 두명이 찾아와 수술할 때까지 담배를 피울 정도로 상태가 좋았지만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이틀 뒤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1853~1890). ‘색채의 마술사’로 최고의 찬사를 받는 고흐는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전도사를 거쳐 화가로 입문해 평생 900여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가 살아 생전 판매된 그림은 ‘붉은 포도밭(1888)’ 한 점 뿐이었다. 그가 남긴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에 △해바라기 △꽃피는 아몬드나무 △감자를 먹는 사람들 등 다수다.

이 시대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그림이 왜 외면 받았을까. 당시 귀족들의 취향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농촌, 피폐한 농민 등을 그린 탓에 모두가 구매를 꺼렸다. 고갱에 선물하기 위해 그린 ‘해바라기’도 생생함이 아닌 시들어가는 모습으로 당시 화풍과는 궤를 같이 하지 못했다.

‘벽지 밑그림만 못한 조잡한 낙서화’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납작하다.’ 당시 신문에도 고흐 그림에 대한 혹평이 이어졌다. 정신적으로도 불안정 했던 그에겐 참 힘든 기간이었을 것 같다.

무명의 화가가 세계 최고 셀럽이 된 데는 그가 떠난 뒤 동생 테오의 부인 요한나와 테오의 아들 마케팅 힘이 컸다.

요한나는 고흐 그림을 전 유럽에 알리기 위해 △그림 가치를 높이자 △스토리를 만들자는 마케팅 전략을 짰다. 1905년 본격 활동에 나섰다.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고흐 회고전을 열었으며 480점을 전시했다. 마침내 런던국립미술관에 해바라기 작품을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스토리 만들기 작업에도 매진했다. 두 형제가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 1914년 책으로 펴냈다. 묘지도 같은 자리로 이장하며 형제애가 돋보이도록 했다. 요한나의 마케팅 덕택에 ‘위대한 작품+천재적 마케팅=세계적 화가로 등극’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요한나의 마케팅은 ‘상업의 나라’ 네덜란드의 힘에서 나왔다는 평가도 있다. 작은 나라가 동인도회사 등을 설립, 한 때 전세계를 식민지화 하면서 해양세력으로 위세를 떨쳤던 그들의 DNA가 한몫 했다고도 한다.

살아 생전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고흐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게 됐다.

그의 작품은 경매시장에서도 최고가를 경신했다.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가셰박사의 초상’이 984억원, 지난해 11월 ‘사이프러스가 있는 과수원(1888)’이 1600억원에 낙찰됐다.
이달 초 취재 차 들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에는 고흐 작품을 감상하러 온 전세계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명성이 인정받는 것같아 위안이 됐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선 새 인물 수혈을 위한 탐색전이 가열되고 있다. 3선 이상 의원에겐 페널티를 줘야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유권자 입장에선 선수보다 미래정치를 위한 잠재력과 역량을 갖췄는지가 중요하다. 임기 4년 중 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선 이름의 초선의원들도 있다. 슬픈 일이다.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여야 모두 선수를 넘어 미래가 촉망되는, 내공을 갖춘 전도 유망한 인재를 내세워야 한다.

‘쌀을 빨리 키우기 위해 서둘러 목을 뽑아 올리’는 ‘알묘조장’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이젠 가우디, 고흐처럼 떠나고 난 뒤 뒤늦게 인물됨을 알아 차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그 판단은 오로지 유권자들의 몫이다.